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식(전승절)'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러시아 크렘린궁이 30일 밝혔다. 김정은의 최초 해외 방문이자 국제 무대 데뷔가 무산됨에 따라 북한의 국제적 고립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북한 측이 '김정은 제1비서가 이번에 모스크바에 갈 수 없게 됐다. 평양에 남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고 밝혔다. 우리 외교부도 "김정은의 불참 소식을 외교 경로를 통해 전달받았다"고 했다.
그동안 러시아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등을 통해 북·러 정상회담 가능성을 내비치는 등 김정은의 전승절 참석을 기정사실화해왔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주요 서방 정상들이 대거 불참하는 상황에서 김정은을 '흥행 카드'로 삼겠다는 의도였다. 북한 또한 중국과 관계가 악화되고 대일(對日)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러시아를 최후의 외교적 탈출구로 여겨왔다. 실제로 최근 북한의 고위 인사들은 사전 준비 작업을 위해 모스크바를 잇따라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크렘린궁은 공식적으로 '김정은 불참' 소식을 전하면서 "북한 내부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김정은 방러가 불발된 이유에 대해 "북·러 양측이 김정은의 의전·경호 문제에 대한 합의에 실패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북한은 김정은의 첫 외교 무대인 만큼 '특별 대우' 또는 '최고 예우'를 요구했지만, 세계 여러 정상을 맞아야 하는 러시아 측이 난색을 표했다는 것이다. 특별 대우가 없으면 김정은의 건강상태·행동·습관 등이 전 세계 언론을 통해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러시아가 30여명의 정상 중 김정은에게만 특별 대우를 해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김정은이 명목상 국가수반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의전 문제가 더욱 꼬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수석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러시아가 확실한 대북 경제원조 카드를 제시했다면 북이 어느 정도 의전적 부담을 감수할 수 있었겠지만, 서방권의 경제 제재로 위기에 처한 러시아가 북한이 만족할 만한 지원책을 제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중국을 의식해 러시아 방문을 포기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김정은이 국제사회 첫 데뷔 무대로 베이징이 아닌 모스크바를 선택할 경우, 그동안 소원해진 중국과의 관계가 더 악화될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김정은이 모스크바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처음 조우하는 것은 매우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정은은 2012년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뒤 아직까지 다른 국가를 방문한 적이 없다. 북한 내에서도 외국 정상을 만난 적이 없다. 정부 소식통은 "이번 방러 불발을 계기로 김정은은 점점 더 국제사회의 외톨이 신세가 될 것"이라며 "이런 상황이라면 9월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할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김정은 대신 북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방러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에선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참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