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은 15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김정남 피살 당시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국정원에 따르면, 사건은 13일 오전 9시쯤(현지 시각)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청사에서 벌어졌다. 김정남은 이날 오전 10시로 예정된 마카오행 비행기 탑승권을 뽑기 위해 무인발권기에 줄을 선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20대로 추정되는 ‘아시아계’ 여성 두 명이 김정남에게 접근했고, 이 중 한 명이 신체 접촉을 한 이후 도주했다고 한다.
국정원은 “이 과정에서 독극물 테러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지만 “어떤 방법으로 독극물 테러를 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처음 김정남 피살 사건은 ‘독침 테러’로 알려졌지만 ‘독 스프레이’나 ‘독 헝겊’ 등이 사용됐을 가능성도 거론됐다. 독극물 테러를 당한 김정남은 현장에서 즉사(卽死)하지 않았고, 인근 카운터에 도움을 요청하고 쓰러졌다.
구급차를 이용해 30여분 거리의 푸트라자야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이송 도중 사망했다는 게 국정원의 설명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김정남의 사인에 대해 “독극물 테러로 강력히 추정되지만, 정확한 사인은 부검을 통해 확인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정남을 살해한 두 아시아계 여성은 바로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도주했다. 국정원은 이날 “김정남과 이 두 여성의 관계는 전혀 모른다. 두 여성은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다만, 국정원은 두 여성의 국적을 ‘북한’으로 특정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용의자를 추적 중인 말레이시아 수사 당국은 이들이 다른 국가로 도주하지는 못했다고 판단했다고 국정원은 밝혔다. 국정원은 김정남이 지난 6일 말레이시아에 입국해 6일간 체류한 이유에 대해선 “관광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 등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남 암살을 놓고 ‘망명을 시도하려 했기 때문 아니냐’는 관측을 제기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15일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서 “김정남의 망명 시도나 요청은 없었다”며 선을 그었지만, 외교가에서도 “김정남이 이달 초 신변 위협을 느끼고 한국 망명을 시도한 정황이 있다”는 말이 돌고 있다. 안보 부서 관계자는 “김정은이 김정남을 없애기로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있는지 분석 중”이라고 했다.
국정원은 이날 국회 정보위 간담회에서 ‘김정남의 망명 시도가 있었느냐’는 정보위원들의 질문에 “특별한 망명 시도나 요청은 없었고 이전에도 없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번 암살은 김정은이 집권 직후인 2012년 초 내린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오랜 노력의 결과 실행된 것이지 암살 시점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오랜 ‘스탠딩 오더’(취소 때까지 유효한 지령)가 집행된 것”이라며 “김정남이 통치에 위협이 된다는 계산적 행동이라기보다는 김정은의 편집광적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고 정보위원들이 전했다. 국정원 1차장을 지낸 남주홍 경기대 교수도 “김정은은 피해망상이 심각하고 중요한 결정을 충동적으로 내리는 일이 잦다”며 “암살 지령도 그런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설명엔 허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고위직 출신 탈북자 A씨는 “수령이 직접 내린 ‘1호 지령’을 북한 공작 기관들이 5년간 이행하지 못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며 “더구나 김정남은 별다른 경계심이나 경호원 없이 식당·카지노 등 공공 장소를 다니는 ‘쉬운 표적’이었다. (만약 5년간 실행하지 못했다면) 직무 유기를 한 것”이라고 했다.
국책 연구소 관계자는 “국정원 설명대로 2012년부터 암살 시도가 있었다면 당연히 망명을 포함해 다양한 방식으로 살길을 찾았을 것”이라며 “망명 가능성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 오히려 불필요한 의혹을 사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이날 국정원 보고에 따르면 김정남은 2012년 암살 미수 사건을 겪은 뒤 김정은에게 ‘저와 제 가족을 살려달라’는 내용의 편지까지 보낼 정도로 신변 위협을 걱정했다. 이 편지엔 ‘저와 제 가족에 대한 응징 명령을 취소해달라. 저희는 갈 곳도 피할 곳도 없다. 도망갈 길은 자살뿐임을 잘 안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이런 이유 등으로 상당수 북한 전문가는 “김정남의 정치적 영향력은 ‘제로’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암살이란 방식으로 제거해야 했다면 그럴 만한 긴급한 사안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세종연구소의 정성장 통일전략연구실장은 “김정남이 망명을 시도해 김정은이 그것을 막고자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실제 이달 초 외교가엔 “김정남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몇몇 측근 외교관과 함께 한국 망명을 준비 중”이란 소문이 돌았다.
정보기관 관계자도 “그런 첩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전직 공안 기관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시절 김정남의 망명 시도가 좌절된 적이 있다”면서 “김정남이 최근 다시 망명 의사를 타진하다가 북한 정보망에 포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한 야당 정보위원은 “우리나라에서 시도했던 망명 공작이 실패한 것 아니겠느냐는 추측도 가능하다”며 “국정원으로선 사실이라 해도 부인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일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김정남이 망명을 시도한 게 사실이라면 최근 국제 정세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국정원 국장 출신 B씨는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 정부를 향해 세컨더리 보이콧까지 거론하며 ‘역할을 하라’고 매우 강하게 압박하는 상황”이라며 “중국이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는 그대로 두고 김정은만 교체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고, 이 경우 김정남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김정은이 김정남을 소환 또는 제거하려 했다면 김정남도 위협을 느끼고 긴급 망명을 시도했을 것이란 얘기다. 이와 관련, 일부 탈북자와 북한 소식통은 “김정남이 북한 당국의 소환 명령에 응하지 않아 살해됐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