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각)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다음 주 4차 방북 계획을 취소시켰다. 전날 폼페이오 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 방문 일정을 직접 발표한 지 하루 만이다. 북한 비핵화에 충분한 진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게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6·12 미·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 비핵화 과정이 더디다며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줄곧 ‘정상회담은 성공적’이라거나 ‘김정은이 비핵화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정상회담 후 두 달이 넘도록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 북핵 협상 실무를 총괄하는 폼페이오 장관이 4차 방북을 통해 비핵화 협상에 돌파구를 만들 수도 있을 거란 관측이 있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급제동을 걸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 동부 시각 오후 1시쯤 트위터에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취소를 발표하면서 "중국에 대한 우리의 무역 입장이 훨씬 더 강경해져서 중국이 예전만큼 비핵화 과정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북한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버티는 뒤에 중국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에 동시에 경고를 보냈다는 해석이 나온다. 미·북 비핵화 협상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6·12 정상회담 후 두 달이 넘도록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비핵화에 진지하지 않다는 회의론을 의식해 지금까지 공개석상에선 북한 비핵화에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는 낙관론을 폈다. 그는 20일 로이터와의 인터뷰 때도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외에 비핵화를 진행 중이란 것을 보여주는 조치를 했냐’는 질문에 "김정은이 구체적 조치를 취했다고 믿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북한의 더딘 속도에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이 쌓이고 있다는 신호가 최근 잇따라 포착됐다. 그는 21일 웨스트버지니아주(州) 선거지원 유세에서 "북한 제재를 빨리 풀어주고 싶지만 북한이 먼저 핵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이 노골적으로 제재 완화·해제를 요구하고 있지만, 비핵화가 우선이란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 23일 방송된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북한이 더 빨리 움직이길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북한에 매우 무거운 제재를 부과하고 있고 제재를 추가했다"고 했다. 미국은 이달 들어 세 차례 대북 독자 제재를 추가했다. 미국과 북한은 핵 리스트 신고와 종전 선언 요구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이 지난달 3차 방북 때 핵 시설 목록 제출 등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할 것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체제 보장을 위한 종전 선언을 먼저 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폼페이오 장관은 정상회담 전인 1·2차 방북 때와는 달리 김정은도 만나지 못한 채 빈손으로 귀국했다. 미 국무부는 23일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 때 김정은과의 면담 일정이 없으며 만날 거라 예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미리 김정은 면담에 대한 기대를 낮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폼페이오 장관이 또 성과 없이 빈손으로 돌아올 것을 우려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북핵 6자 회담 미측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트위터에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의도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며 "폼페이오 장관이 빈손으로 돌아왔을 것을 고려하면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을 취소시킨 것은) 좋은 결정"이라고 썼다.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부 비확산·군축 담당 특보는 미국의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와 관련해 북한으로부터 긍정적인 신호를 받길 원했지만, 그러지 못한 것 같다"며 "폼페이오 장관이 또다시 빈손으로 돌아올 정치적 위험을 떠안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북한이 핵개발을 계속하고 있다는 분석과 보도는 이어지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20일 보고서에서 북한이 지난 1년간 핵개발을 진전시켰으며 특히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핵 관련 시설을 가동한 흔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미 국무부도 IAEA의 보고서 내용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는 22일 최근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서해 위성(미사일) 발사장 일대를 찍은 위성사진을 분석해 "북한이 서해 위성 발사장 해체 작업을 8월 3일 이후 거의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로이터는 "미 정보기관과 국방부 일부 관리들은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이 성급하다고 봤으며 구체적 진전이 이뤄질 가능성도 낮게 봤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5월 미·북 정상회담을 취소했을 때의 협상 전략을 다시 쓰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그는 5월 24일 미·북 정상회담 취소를 발표했으나, 8일 만에 이를 번복하고 정상회담을 확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취소를 발표하며 미·중 무역 전쟁 때문에 중국이 전만큼 북한 비핵화와 관련해 미국에 협조적이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폼페이오 장관이 가까운 미래에 북한에 갈 것으로 기대한다. 아마 중국과의 무역 관계가 해결된 후가 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들어 여러 차례 중국이 미·북 비핵화 협상을 지연시키고 있다며 중국 배후론을 제기했다. 7일엔 "중국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다"고 했고 16일엔 "중국이 내가 무역 분야에서 취한 조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미·북 관계가 중국 때문에 약간 타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20일 로이터 인터뷰에서도 "중국이 무역 갈등 때문에 과거만큼 북한 문제를 돕고 있지 않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중국이 무역·대북 외교 부문에서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워싱턴포스트(WP)는 24일 트럼프 행정부 소식통을 인용,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미국 농산품에 관세를 부과한 것은 자신이 2016년 대선에서 이겼던 농업 지역을 겨냥한 것으로, 중국이 중간선거에서 자신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려 한다고 참모들에게 말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중 접경 지역에서 양측 교역이 재개되는 등 중국의 대북 제재에 구멍이 뚫렸다고 보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다음 달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을 기념하는 9·9절 열병식에 참석할 것이란 추측도 주시하고 있다. 다음 달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열기로 하고 폼페이오 장관의 추가 방북이 계속 예고된 시점에 시 주석이 평양을 방문하는 것은 의도적이라 보기 때문이다. 시 주석이 실제 방북하면 중국 최고지도자가 2005년 이후 13년 만에 북한에 가는 것이다. WP는 "중국이 북한 압박에 얼마나 동참하고 북한에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는 미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제각각"이라며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중국의 불공정한 대미 무역 관행에 확실한 변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현재로서는 미·중 무역 협상이 조만간 타결점을 찾긴 어렵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양측은 22일 미 워싱턴 DC에서 무역 협상을 재개했지만, 이날 양측은 각각 160억달러에 달하는 상대국 수입품에 25%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며 기싸움을 이어갔다.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량살상무기 조정관은 VOA에 "미·중 무역 분쟁이 곧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중국 때문에 북한 비핵화 진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 맞는다면, 이런 상황은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트위터에 3차례 글을 올리기 몇 시간 전 폼페이오 장관과 앤드루 김 미 중앙정보국(CIA) 코리아임무센터(KMC) 센터장이 백악관 웨스트윙(백악관 참모들 근무 공간)을 들어가는 게 포착됐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CNN에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 글을 올렸을 때 폼페이오 장관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에서 막 돌아온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도 스피커폰으로 연결돼 있었다고 샌더스 대변인은 밝혔다. 국무부 실무진은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발표를 사전에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CNN은 한국 외교 당국에도 난데없는 발표였을 것이라고 전했다. CNN은 외교 소식통을 인용,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발표하기 전 한국 정부에 그의 결정을 알렸을 수도 있으나, 어쨌든 한국 외교 실무자들에게는 갑작스런 소식이었다"고 전했다. 애덤 마운트 미국과학자연맹 국방 연구원은 CNN에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을 취소시킨 것은 다음 달 3차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고립시키는 결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