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 리스트 신고나 핵·미사일 반출 등 근본적 비핵화 조치를 먼저 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북미 대화는 잠정 중단 상태에 빠졌다. 미국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 재개와 제재를 거론하며 대대적 대북 압박 쪽으로 태세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세 변화에 우리 정부도 이달 중으로 예정했던 개성공단 내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 개소를 연기했다. 매티스 장관은 28일(현지 시각) “더 이상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할 계획이 없다”며 “훈련은 계속된다”고 말했다.
한·미 훈련 중단은 싱가포르 회담의 가장 직접적 결과물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담한 당일 싱가포르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는 워 게임을 중단할 것”이란 말로 한·미 훈련 중지를 전격 발표했었다. 당시 미 국무부는 “선의(善意)를 보이는 차원에서 미국은 생산적인 대화가 지속되는 한 한국과의 ‘워 게임’을 중단하기로 한 것”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었다. 그랬던 미국이 ‘훈련 재개’를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 ‘현재 김정은은 비핵화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8일 발표한 성명에서 “평양행을 연기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했던 ‘북한을 완전히 비핵화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준비가 돼있다는 것이 분명해질 때 미국은 다시 대화(engage)할 준비가 돼있다”고 했다. 헤더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도 “언젠가는 폼페이오 장관이 다시 북한에 갈 것인가”란 질문에 “북한이 대화할 준비가 되고 그것이 생산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때”라고 답했다. 현재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지키면서 생산적 대화를 할 준비가 돼있지 않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남북 간 예견된 여러 현안들도 줄줄이 연기될 전망이다. 우리 정부는 8월 말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이 순조롭게 이뤄지면 이를 ‘비핵화 진전’으로 보아 개성공단 내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를 개소할 예정이었다. 또 9월 중순 남북 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에 포함된 도로·철도 연결을 비롯한 각종 교류·협력 사업을 대폭 확대 추진하려는 구상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내 기류 변화로 연락사무소 개소마저 불투명해진 상황이며 북한이 만족할 만한 교류 사업 이행도 난관에 부딪혔다. 이 밖에도 북한 정권 수립일(9월 9일)을 계기로 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유엔 총회(9월 하순)를 전후로 한 김정은의 방미와 미·북 2차 정상회담 등 9월 중 성사 가능성이 거론돼 온 대형 외교 이벤트들도 줄줄이 영향을 받게 됐다.
북한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미국은 대북 압박의 수위를 더욱 높이기 시작했다. 28일 하루 동안 매티스 국방장관,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가 돌아가면서 북한의 ‘선(先) 비핵화 조치’를 압박하는 메시지를 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모든 회원국은 북한이 모든 핵무기,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과 다른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데 투표했었다”고 밝혔다. 미국의 비핵화 요구에 대해 ‘선(先) 종전 선언, 평화 협정’을 주장해 온 북한에 대한 메시지였다.
북한의 비핵화는 종전 선언이나 평화 협정 등과 맞교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에 명시된 국제적 의무란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헤일리 대사는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바꾸거나 그러고 싶어 하는 것일까? 가능한 얘기다”라고 했다. 이어 그는 “우리(미국)는 제재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비핵화나 그것이 세계에 대한 위협이 된다는 시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선(先) 비핵화 조치 없이 제재 해제는 없다는 경고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