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 열병식에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대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개막 연설에 나서 ‘경제 재건’을 강조했다. 2013년 이후 5년 만에 열린 9·9절 70주년 열병식에서 김정은이 직접 연설에 나서지 않았고,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등장하지 않았다. 북한이 미국과 비핵화 협상 진척을 염두에 두고 전형적 ‘로키(low-key) 전략’을 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영남은 이날 연설에서 “우리는 모든 정치·군사·경제·문화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이루며 위대한 번영의 시대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외부 세계의 공격 위협과 침략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당의 노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발전시켰다”며 “전쟁에 대비하는 동시에 경제 개발을 위한 전투도 준비하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등 국제사회를 자극할 수 있는 핵 관련 언급은 빼고 북한 정권의 경제 재건 목표를 강조한 것이다.
김정은은 주석단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특별대표로 방북한 중국 서열 3위 리잔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등과 열병식을 지켜봤다. ‘경제 구축을 위해 모든 노력을!’ ‘경제력 구축 기반을 앞에 두자!’ 등이 적힌 팻말을 든 시민들의 행진도 이어졌다. AP통신은 “열병식 절반 가까이가 경제 건설을 위한 북한 국민의 노력을 보여주는 데 집중됐다”고 전했다. 김정은은 올해 신년사에서 “새해는 우리 인민이 공화국 창건 70돌을 대경사로 기념하게 된다”고 성대한 9·9절 행사를 예고했었다.
그만큼 김정은이 연설을 하지 않은 것은 의외라는 분석이다. 정권 수립 70주년 성과로 내세울 경제·외교적 성과가 없었고, 대외적으로는 비핵화 협상 상대인 미국을 의식한 조치로 풀이된다. 이날 열병식에는 ICBM은 물론이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중·단거리 탄도미사일도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북한은 대전차 미사일 8발을 장착한 대전차(對戰車) 장갑차, 신형 포탑·포신을 장착한 152㎜ 자주포 등 일부 신형 재래식 무기를 선보였다. 미국과 국제사회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비핵화 협상과 무관히 전력 증강은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지난 2월 건군절 열병식에선 ICBM을 비롯, 남한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도 공개했다. 하지만 이번엔 스커드·KN-02 등 단거리 탄도미사일도 등장시키지 않았다. 18일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측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도 담긴 것으로 해석됐다. 북한이 이날 처음 공개한 신형 대전차 장갑차는 한국군의 신형 K-2 ‘흑표’ 전차와 주한 미군의 M1A2 SEP 신형 전차에 대응하는 무기다. 신형 152㎜ 자주포는 기존 152㎜ 자주포에 비해 사거리가 늘고 정확도가 높아진 것으로 추정된다.북한은 이날 최대 사거리가 200여㎞에 달하는 신형 300㎜ 방사포(다연장 로켓), 최대 사거리 100~150㎞인 ‘북한판 패트리엇 미사일’ 신형 KN-06 지대공(地對空) 미사일(일명 번개 5호)도 공개했다.
이런 가운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석 달여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여정은 8일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일을 맞아 방북한 중국 권력 서열 3위인 리잔수(栗戰書) 중국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장을 평양국제공항에서 영접했다. 최룡해 당 부위원장 겸 조직지도부장, 이수용 당 국제담당 부위원장 등 북한 권력 핵심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김여정은 또 북한이 정상급 국빈에게 제공하는 백화원 영빈관에서도 리잔수 일행을 맞았다. 김정은이 중국 측 대표단 영접에 각별히 공을 들인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여동생을 전담 영접사로 내보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여정은 지난 5일 남측 대북 특사단이 김정은을 면담했을 때는 불참했다. 그런데 중국 특사 영접에는 직접 나선 것이다. 김여정은 지난 2월 김정은의 친서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고, 3월 방북한 우리 특사단의 김정은 면담 때 배석했다.
4월과 5월 두 차례의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당시에도 참석했다. 하지만 이후 3개월간 김여정의 활동은 북한 매체에 공개되지 않았다. 북한 지도부는 정권 수립일인 9·9절 70주년을 맞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한 대대적 충성 맹세 행사를 벌였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중앙군사위원회, 국무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 등 5대 권력 기구가 모두 충성 맹세에 참여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낭독한 ‘공동축하문’ 형식의 충성 맹세에서 당·정·군은 “(김정은이) 평화 수호의 강력한 보검을 마련해 후손들은 다시는 고난의 행군과 같은 처절한 고생을 겪지 않고, 전쟁의 불구름을 영원히 모르게 됐다”고 치켜세웠다. 김정은은 9·9절을 맞아 군 장성 승진 인사도 했다. 승진 대상자는 총 46명으로 비교적 큰 규모다. 군부의 충성심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로 보인다.
김정은은 당·정·군 고위 간부들과 함께 금수산태양궁전도 방문했다고 9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정은이 9·9절을 계기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한 것은 지난 2012년 이후 6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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