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식량 지원 문제가 거론되는 가운데 북 매체들이 잇따라 식량난을 부각하는 보도를 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7일 "풀 먹는 집짐승 기르기를 군중적 운동으로 벌리자"고 했다. 노동신문은 "토끼·양·염소를 비롯한 집짐승을 많이 길러야 알곡(곡물) 먹이가 아니라 풀 먹이를 가지고 고기와 젖, 털, 가죽을 생산할 수 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김일성이 추진하다 실패한 '풀과 고기 바꾸기' 정책을 다시 꺼내 든 것이다. 북한 매체들은 지난달 30일에도 "쌀이 금보다 귀하다"며 식량 증산을 촉구했다. 북한의 식량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풀과 고기 바꾸기' 정책은 북한 경제 사정이 어려웠던 1950년대부터 김일성이 추진했었다. 1962년 8월 김일성이 평북 창성에서 열린 '지방당 및 경제일군 연석회의'에서 "풀과 고기를 바꿔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지시를 내렸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김정일 집권기인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산에 염소를 길러 '풀과 고기를 바꾼다'는 정책을 다시 실시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토끼 기르기' 운동으로 이어졌다. 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강원도에서 대규모 인공 풀판을 조성해 '풀과 고기를 바꾼다'는 정책을 실시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북한 축산 전문가인 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원은 "'풀과 고기 바꾸기'는 식량이 부족할 때 단골손님처럼 함께 등장하는 실패한 정책"이라고 했다. 실제로 국제사회의 고강도 대북 제재가 집중된 2017년 하반기부터 북한 주민들의 식생활 수준 등 생활 형편이 악화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지난해 10월 발표한 '북한 사회 변동과 주민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끔 먹을 것이 부족했다'는 12.1%에서 17.2%로 증가했고, '자주 먹을 것이 부족했다'는 응답은 5.3%에서 9.2%로 늘었다.
북한의 지난해 식량 생산량은 495만t으로 2017년(545만t)에 비해 약 9% 줄었다. 대북 소식통은 "지난해 이상 기온과 가뭄, 비료 부족 등으로 곡물 생산량이 줄고, 식량 수입도 어려워졌다"고 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대북 제재를 허물기 위해 식량난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북한식 '꼼수'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미국 백악관은 8일(현지 시각) 대북 최대 압박 기조를 재확인하면서 우리 정부의 인도적 대북 지원에 대해선 개입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북한의 발사체 시험 발사에도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겠다는 한국의 발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러한 입장을 전했다.
샌더스 대변인은 "북한에 관한 우리의 입장은 최대 압박 전략을 계속해 나간다는 것"이라며 "우리의 주안점은 비핵화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의 대북 식량 지원과 관련해 "한국이 그 부분에 있어 진행해 나간다면 우리는 개입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뜻을 밝혔다. 비핵화를 위해 대북제재를 비롯한 최대 압박 원칙은 유지하지만, 인도적 지원인 대북 식량 지원은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청와대와 백악관은 앞서 있었던 양 정상 간 전화통화에서도 대북 식량 지원에 대해 논한 바 있다. 청와대는 지난 7일 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 대통령이 통화한 후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이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에 식량을 제공하는 것이 매우 시의적절하며 긍정적 조치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이를 지지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1시간여 뒤 백악관은 "두 정상은 북한의 FFVD(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 달성 방안을 논의했다"고만 했다. ‘대북 식량 지원’과 관련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선 "양국 정부 간에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의 미묘한 차이를 반영한 것 아니겠느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한편 미국과 북한의 긴장감이 커지는 가운데,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지난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후 첫 방한해 눈길이 쏠린다. 전날 입국한 그는 10일까지 청와대를 예방하고,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북핵 협상 수석대표 협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반도 정세, 대북 식량 지원 문제 등을 협의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