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사진)은 미·북 비핵화 협상이 결렬될 경우 미국이 그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부상은 22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외무부 청사에서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아태 지역 담당 외무차관과 회담한 후 청사를 나오며 기자들과 만나 회담 결과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같이 밝혔다. 최 부상은 “미국이 우리에게 상응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외교의 기회가 사라지는 경우 그러한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 측이 져야 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 부상은 미국 측이 북한의 비핵화 선제 조치에 대해 아무런 상응 조처를 하지 않았고 배신감만 안겨줬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우리가 시간도 줬고 또 신뢰 구축 조치도 취했지만 우리가 받은 상응 조치는 아무것도 없고, 받아낸 것은 배신감뿐”이라고 지적했다. 최선희가 말한 북한의 비핵화 선제조치란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 및 발사 유예,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등의 조치를 말한다. 북한은 2017년 11월 말 미국 전역에 도달 가능한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형'의 시험 발사 성공 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에 올라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하지만 군사전문가들은 북한이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사거리 연장 시험에 성공했지만 탄두의 대기권에 재진입 기술은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분석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최종 기술의 완성 단계를 미완성으로 남겨 두고 성급히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것과 관련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가중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즉 '핵무력 완성' 이후 평화공세로 태세를 전환해 '핵무력'을 보존하면서 대북제재를 해제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1월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평창동계올림픽 참석 의사를 밝힌 북한은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부장 등 고위급대표단을 파견해 남북관계의 물꼬를 텄다.
이어 3월 김정은의 방중과 남한특사단의 방북, 4.27남북정상회담과 6.12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문재인 대통령의 9월 평양 방문 등 연이은 평화공세로 긴장국면을 완화시켰다. 올해 2월 하노이 미북2차정상회담에서 비핵화 방안을 두고 양측의 입장차가 극명하게 드러나면서 결국 결렬에 이르렀다. 북한은 영변핵실험단지 완전 폐쇄와 미국과 국제사회가 2016년부터 결의한 핵심 대북 제재 5건의 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영변 지역 외에도 3~4곳의 핵시설을 거론하며 북한의 핵미사일 리스트 제출을 요구했다. 하노이 노딜 이후 김정은은 미국에 올해 연말까지 '새로운 해법'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초조해진 북한은 미국에 대한 압박공세에 나서고 있다. 특히 북한이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한미 연합훈련 중단 등 대북적대시정책의 철회다.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장은 19일 담화에서 미국에 비핵화 협상 재개를 위한 조건으로 한미연합훈련의 중단을 요구했었다. 김영철은 최근 한·미 군사 당국이 북한을 고려해 연합공중훈련을 연기했음에도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남조선과의 합동군사연습에서 빠지든가 아니면 연습 자체를 완전히 중지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비핵화 대화 모멘텀을 살리기 위한 일회성 한·미 훈련 중지나 연기가 아니라 '영구적 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이 비핵화 협상에서 북한에 요구해왔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모방해 "'완전하고도 되돌릴 수 없는(complete and irrevocable)' 대조선(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라"고도 했다. '하노이 노딜' 이후 철저히 '남조선 패싱' 기조를 이어온 북한이 한·미 동맹 해체까지 염두에 두고 미국을 압박하는 모습이다. 김영철은 이날 담화에서 "이제는 미국 대통령이 1년도 퍽 넘게 자부하며 말끝마다 자랑해온 치적들에 대해 조목조목 해당한 값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외교 치적'으로 내세워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유예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것이다.
전날 김계관 외무성 고문 담화에 이어 연이틀 내년 대선을 앞둔 '트럼프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며 압박 수위를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미·북 협상이 재개될 기미가 보이자 '레드라인'을 넘을 수 있다고 위협하며 각종 청구서를 던지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