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공업 정책 실패시 김정은의 리더십 타격 불가피

한기범
전 국정원1차장(아산정책연구원 객원연구위원)
김정은은 지난 1월 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지방주민들의 생필품 공급 부족을 ‘심각한 정치적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매년 20개의 시·군에 기초식품, 의류, 일용품을 생산하는 경공업 공장을 10년간 지속적으로 건설하는 이른바 ‘지방발전 20×10 정책’을 발제했다.
북한에서 ‘지방공업 공장’이란 간장·된장, 양말, 비누와 같은 식료품·의류·일용품 등 지방주민들의 필수 소비재인 경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규모 공장·기업을 의미한다. 북한은 정권 초기부터 중공업 중심 발전전략을 채택하면서, 지방주민들을 위한 필수 소비재 문제는 시군 단위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해 해결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북한의 지방공장 숫자는 1980년대 초반에 약 3,300여 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90년대 중반 경제 위기로 많은 수의 지방공장들이 가동 중단되었다가, 2000년대 초 구조조정 과정에서 1,800여 개의 공장을 정리하고 다시 개건·현대화된 2,900여 개의 중·소규모 공장들을 중심으로 지방경제의 골간은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북한의 지방공업은 중앙의 도움 없이 지방 자체 운영 원칙이 유지되어 안정적인 원료 조달과 전력 공급, 경영 효율성 면에서 극히 취약한 실정이었다.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지방공업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했지만 실제적인 지방발전 지원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올해 연초부터 북한 매체들은 갑자기 ‘지방공업 발전’ 추진 소식을 연일 게재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김정은이 올해 1월 최고인민회의 회의에서 지방의 생필품 공급 부족 문제의 심각성을 거론하면서 경공업 공장 증설을 약속하고 나서부터다. 김정은은 “인민들의 소박한 생활상 요구마저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고 “수도와 지방의 차이”가 심각하다며 경공업 공장을 매년 20개 시군에 10년간 설치하는 ‘지방발전 20×10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 문제를 구체화하기 위해 북한은 당 정치국 회의를 1월 23~24일 묘향산에서 소집했다. 김정은은 정치국 회의에서 “지방 인민들에게 초보적 생필품조차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은 심각한 정치적 문제”라면서 “지방발전 20×10 정책은 과거처럼 말로만 해오던 선전이 아니라 실지 실행을 결단한 변혁적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지방 민심이 심상치 않음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 직전에 묘향산에서 경제난국 타개를 위해 소집한 ‘경제부문일꾼회의’를 연상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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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월 28일 평안남도 성천군 지방공업공장 착공식에 참석해 착공의 삽을 뜨고 있다./노동신문
‘지방공업 발전’ 정책은 중앙에서 소요 자금·자재·설비를 제공하고, 군대에서 공장건설 인력을 동원하며, 지방에서 운영을 책임지는 방식으로 추진된다. 김정은은 성천군 공장 착공식 연설(2.28)에서 “공장건설에 필요한 자금과 노력, 시멘트·강재를 국가에서 전부 보장한다”고 했다. 공장건설을 맡은 군대는 국방성 산하에 ‘지방발전 20×10 비상설국방성지휘조’를 구성하고 지역별로 124연대 등 분담조직을 만들어 4만 명 규모로 추정되는 군인 건설자들을 동원했다.
이처럼 김정은이 직접 지방공업 발전 정책을 내놓고, 당·정·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지방공장 건설을 서두르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평양과의 상대적 박탈감에 따른 지방 민심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탈북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은 집권 이후 권력층의 부패와 사경제 활동을 통한 축재로 평양과 지방 간 양극화 현상은 심각해졌고, 식량 배급, 병원 진료, 난방과 식수 공급 등 공공 서비스 격차도 극심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17년 이후 경제제재·국경밀봉·코로나 발생 등으로 경제 규모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지방주민들의 생활난은 더욱 나빠졌다.
거의 기아 상태로 방치되었던 지방주민들은 2022년 가을 코로나 통제가 풀리자 생활난에 따른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 사태로 곡물 유통이 어려워지면서 개성 주민들마저 굶주릴 정도로 평양 외 지역의 식량 사정이 나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주민의 상대적 박탈감은 김정은이 성천군 공장 착공식(2.28)에서 “이제 시작해서 자괴심이 들고 송구스럽다”는 발언과 “얼마나 고마운지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주민 반응(2.11 노동신문)을 통해서도 짐작된다.
김정은이 지방공업 발전을 서두르는 또 다른 이유는 2025년 10월 당 창건 80돌과 2026년 1월 9차 당 대회를 앞둔 주민 시혜 조치의 일환인 것으로 평가된다. 9차 당 대회 일정은 아직 밝히지 않았으나 내년이면 ‘8차 당 대회 사업 총화(결산)’를 해야 하는 시점으로 북한 당국으로서는 민생개선에 이바지한 치적 거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리고 지방발전 정책은 10년짜리 중장기 정책으로 시간 벌기 속셈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제재로 대외경제여건 개선이 불투명한 상황이 지속됨에 따라 내수 활성화를 위해 지방경제 발전을 도모하는 측면도 있다. 북한은 지난해부터 대외교역이 증대되기는 했으나 수출은 90%가 제재로 묶여 여전히 외화 획득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여건에서 지방공업에 대한 투자로 필수 소비재 공급을 통한 내수를 충족시키고 지방공업의 수익 창출로 이어지게 한다는 계산이다.
결론적으로 북한이 이번에 추진하는 ‘지방발전 20×10 정책’은 지도자의 의지와 그 선전 동향으로 볼 때 제한적, 일시적 성과는 거둘 것이다. 공장이 신설 지역 주민들에게는 2~3년 일정한 혜택을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면한 여러 경제사업에 대한 우선순위 조정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투자재원 확보에 한계가 있고, 주민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10년 시간 벌기 성격의 사업이라는 점에서 지방주민들의 생활난 해소에 근본적인 치유책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또 사업 여건과 전망을 제대로 따지지 않은 김정은의 돌발적이고, 의욕적인 지시로 여타 경제정책 추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소지도 있다. 과거 김정은은 7차 당 대회에서 제시된 ‘경제발전 5개년 전략(2016~20)’이 경제 간부의 ‘비현실적인 주관적 욕망’ 때문에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이번에는 같은 이유로 지방발전 정책이 실패한다면 김정은의 리더십에 타격을 받을 수도 있고, 지방주민들의 원성이 증폭될 수 있다. 마식령스키장,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20여 개 경제특구개발, 평양종합병원 건설 등 부실한 김정은표(表) 경제사업들이 허다하지만, 이번 정책은 지방주민들의 실생활과 직결되었다는 점에서 실패하면 내부에 미치는 파장이 자못 클 수가 있다.
최근 들어 김정은이 체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 카드를 여러 개 던지고 있다. 남북관계를 두 개의 적대관계로 규정하면서 내부적으로 ‘민족 지우기’를 진행한 데 이어 지난 4월 태양절에는 ‘선대 지우기’로 홀로서기를 강화하고 있다. 또 심각한 ‘부족의 경제’ 상황에서 지방공장 증설 카드를 내보이면서 ‘친근한 어버이’라는 애민관을 집중적으로 부각하고 있는 것은 북한 내부에 오랜 핵미사일 고도화 정책의 부작용으로 김정은 리더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민족 지우기’의 혼란 상황에서 지방발전을 도모한다는 전국적인 야단법석이 무위로 귀결되면 북한 내부의 민심 이반은 증폭될 것이고 지배 연합에서 김정은의 리더십은 타격을 받을 것이다. 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거꾸로 지방발전 정책에 성과를 거둠으로써 김정은의 호전성이 줄어들고 경제에 대한 관심사가 확대되면서 긍정적인 변화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