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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정세

남북관계와 북한정세를 심층 분석합니다.
북한의 공간문헌과 정보를 분석하여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정책방안을 제안합니다.



 통일비전연구회 제2기 24차 역사연구세미나가 2013년 12월 28일 통일비전연구회 연구실에서 진행되었다. 연구회에서는 송항룡 교수의 저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금 바로 여기'독서발표회가 있었다. 책은 시간과 공간은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 내가 서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한다. 객관적인 대상으로 마주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내 의식 속에 있다. 그러므로 내가 없으면 시간은 없고 공간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우수사려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다. 그 현장 앞에서 마주 서는 것이 시간과 공간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가면서 살고 있다.
동양철학은 시간과 공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노자와 장자, 불교에서 사물인식과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현상철학이 시간과 공간을 바탕으로 전개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바탕으로 할 때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이 언어다. 언어는 앎의 현상이요, 그 현상이 대상으로 마주 서는 것이 물상이다. 언어 현상이 우리가 인식하는 존재 현상이라는 말이다.
동양철학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언어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그 기반 위에서 전개 발전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주역에서 변화 철학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언어는 노자와 장자 그리고 불교에서 해체 철학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동양철학의 내면적 핵심을 다루고자 한 것이 이 책이다. 저자의 생각으로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언어가 동양철학의 핵심 과제다.

1. 서론

가. 철학함의 끝없는 여정

철학함이란 어부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어떤 그물을 치느냐에 따라 잡아 올리는 고기는 달라진다. 이 그물에 해당하는 것이 철학함에서는 사고의 틀(언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다가 그물 밖에 무량으로 존재하는 물고기의 세계라면, 존재의 세계는 사고의 틀 밖에 인식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무한자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물 안에 들어오지 않은 고기는 바다 속에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밥상에 오를 수 없는 것이요, 사고의 틀 안에 들어오지 않은 존재는 그것이 비록 무한자로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마주 설 수 있는 존재자는 아니다. 어부가 그물을 치는 것은 고기를 밥상에 오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요, 철학함이 우리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인식 밖의 무한자로부터 대상으로 마주 설 수 있는 존재자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우리 앞에 마주 서는 존재자들, 그것은 사고의 틀이라는 그물 안에 들어온, 즉 인식된 앎의 내용으로 마주 서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존재자는 사고함으로써 열리는 앎의 세계에서 마주 서는 것이요, 그것은 아는 만큼 마주 선다. 철학에서 앎의 문제가 핵심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앎의 문제가 곧 존재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앎의 문제는 그물 안의 고기처럼 사고의 틀 안에 들어와 있는 존재자를 다루는 데 있다. 존재자는 인식된 앎의 내용으로 우리 앞에 마주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식 밖의 것은 존재자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내용도 가지지 못하며 대상으로 마주 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앎의 세계가 곧 존재자의 세계가 된다. 그러므로 앎의 세계에서 존재자의 세계가 열린다.
철학함은 앎의 지평을 열어가는 일이다. 앎이 존재자를 만들어가는 것이고 보면 앎의 지평을 열어가는 것은 곧 존재자의 세계를 열어가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앎의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앎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서 만날 수 있으며 그것은 다름아닌 사고의 틀을 바꾸는 데서만 가능하다. 그물을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고기를 잡을 수 없듯이 사고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를 만나지 못한다. 즉 사고의 틀을 바꾸는 것이 앎의 지평을 열어가는 일이다. 하지만 앎의 지평을 아무리 넓혀가더라도 존재의 바닥은 드러나는 일이 없다. 무량으로 남아있는 세계를 무량세계라하며 존재의 바닥이 그러하다. 알고 또 알아도 다 아는 일이 없다. 따라서 앎의 세계는 한이 없고 철학 또한 끝이 없다.
앎의 지평이 열릴 때 새로운 존재자와 마주 서게 되고 그 마주 서는 존재자의 세계가 지금 바로 여기 나의 현실이다. 지금 바로 여기, 내가 서 있는 이 현실은 철학함에서만 새로운 현실로 마주 설 수 있다. 그러나 앎의 지평이 열리지 못할 때 다시 말해서 철학함이 결여되었을 때 마주 서는 현실은 언제나 그대로 있는 죽은 현실이다. 현실은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살아 있으나, 폐쇄된 앎 속에서는 그 살아 있는 새로운 현실을 만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죽은 현실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어 있을 때만이 오늘은 늘 새로운 오늘일 수가 있다. 이러한 새로운 오늘, 살아 있는 현실과 마주 서기 위해 앎의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 다름 아닌 철학함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티끌 하나도 앎의 세계에서는 무량세계 아닌 것이 없고 앎은 어느 것 하나 다 아는 완전 앎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앎의 지평을 한없이 열어가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 철학은 진리를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을 새롭게 만나는 데 있다. 그 현실은 다름 아닌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살아 있는 존재자의 세계다.

나. 철학함의 자리, 그 기반

1) 철학의 정초
동양사상의 철학적 기반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바로 여기는 바로 내가 사는 이 현실이요,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이다. 이 자리만이 현존 실재하는 자리요, 이 현존 실재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동양철학의 기본 입장이다. 이것은 진리의 기반이 실재하는 것이어야 하고 현실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무엇이 실재한다는 것은 그 무엇이 오늘의 이 현실에 있다는 것이요, ‘지금 바로 여기’ 내가 서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어제 있는 것은 있었던 것으로 오늘 있는 것이 아니요, 내일 있는 것은 장차 있을 것으로 오늘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것은 오늘에 있는 것이요 어제나 내일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오늘이 실재의 자리에서는 ‘지금 바로 여기’요, 삶의 자리에서는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현실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시간과 공간이다. 그리고 실재의 주체인 ‘나’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시간과 공간은 모든 존재자의 존재 형식이요, ‘나’는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현존 실재자다. 그러한 나를 실존이라 한다면 그 실존 앞에 마주 선 실재자는 다름 아닌 현전이다. 그 실존과 현전이 철학의 바탕이 된다.
‘나’는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현금찰나의 시간이요, ‘여기’는 그 현금찰나의 시간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그 시공간이 함께하는 자리에 나는 있다. 실존하고 있다. 이 실존 앞에서 어제도 내일도 문제가 되고 원근, 고저도 문제가 된다. 이 원근 고저가 공간이요, 어제와 내일이 시간이다. 이 시간과 공간이 실존 앞에서 문제가 된다는 것은 곧 실존이 시간과 공간의 기점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실존이 시간과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 앞에서 시간과 공간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모든 존재자의 존재 형식이다. 이 존재 형식 속에서만 만물은 존재한다. 이 형식을 실존이 마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존이 존재자의 세계를 열어간다. 존재자는 상으로 존재한다. 물상이 존재자다. 그 물상의 존재형식이 다름 아닌 시간과 공간이다. 그러나 실존적 실재는 물상이 아니다. 존재자가 아니다. 그 실존의 자리가 ‘지금 바로 여기’다. 그리고 그 실존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다. ‘나’야말로 모든 존재자의 세계를 열어가는 주체요, 진리의 기반이요, 실존이다.

2) 시중과 나
 시중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으로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시간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존재의 자리를 공간이라 한다면 그 공간 속에 시간도 함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요, 그 함께하는 자리는 물, 곧 존재자라는 것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물이 존재할 수 없으며, 물이 없으면 또한 시간과 공간은 문제 삼을 수가 없다. 물이 앉은 자리가 공간이요, 물이 옮기는 자리(변화)가 시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물, 곧 존재자를 문제 삼는데 있다. 그러고 보면 있는 것은 오직 물상이 있을 뿐이요, 시간과 공간은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은 그저 물이 앉은 상이요, 시간은 물이 옮기는 상일 뿐이다. 그러나 공간이 아니면 물의 상을 말할 수 없고 시간이 아니면 물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으니, 물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 존재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이 물의 존재 형식이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어 공간만으로 존재할 수 없고 시간만으로 존재하는 물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자는 시공간 속에 있다. 이것이 시중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오늘 현금,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며 과거나 미래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여기는 내가 서 있는 자리다.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다. 바로 나가 ‘시중’이다. 그리고 그 나 앞에 마주 선 존재자들이 시중이다. 현존 실재하는 것들이 시중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의식은 자기 실존 앞에 서지 못하고 있다. 나는 실존하고 있으나 나의 의식은 과거나 미래에 가 있다. 이것이 나 스스로의 실존을 망각하고 살아가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면서 오늘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자기 상실이다. 시중은 자기 상실을 벗어나 오늘에 살라는데 있다.(북한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라고 한다.)

3) 지금 바로 여기
시중은 ‘지금 바로 여기’, 내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없고 오직 나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으며,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공간 개념이 내 의식 안으로 들어온다. 공간은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으로부터 시간 개념이 생겨난다. 이것으로부터 저것으로 옮겨가는 공간을 시간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시간과 공간은 함께 생겨난다.
그러나 나에게서, 나로부터 시간과 공간이 생기는 것이고 보면 시간과 공간은 하나로 함께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어 따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분리된 상태(나의 의식)에서 있는 것이요, 함께 있는 나, 즉 물, 존재자의 자리에서는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는 오직 물만이 있을 뿐이다. 시간도 공간도 없는 물, 곧 존재의 자리를 시중이라고 한다. 
시중이 지금 바로 여기요,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도와 박이 다름 아닌 ‘나’다. 실존이다. 이 실존적 나를 떠나 무엇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무엇을 문제삼을 수 있을가. 시간도 공간도 바로 나로부터 문제가 된다. 그 ‘나’가 있는 지금 바로 여기가 오늘의 이 현실이요, 현실의 문제가 다름 아닌 철학의 문제다.

4) 복과 시중
복이란 동도 아니요 비동도 아닌 포물선의 꼭짓점이 복이요, 오늘도 아니요 내일도 아닌 자정이 복이다. 복은 동도 비동도 아니다. 그 가운데 동정이 있고, 자정은 오늘도 내일도 아니다. 이 복에서 하늘과 땅의 마음을 본다고 “주역”은 말하고 있고 노자는 허정에서 그 복을 본다고 하였다. 하늘과 땅 천지가 우주라면 우주의 마음을 보는 것이요, 천지가 만물이라면 물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주역의 천지지심과 노자의 천지지시가 그것이다. 여기서 시가 마음이다.
그 마음은 무엇으로 보는가. 그 또한 사람의 마음으로 본다. 눈으로는 물을 볼 수가 있으나 물의 마음은 눈으로 보지 못한다. 이 볼 수 없는 물의 마음을 복에서 본다는 것이다. 복은 눈이 가닿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물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물의 시종, 생멸, 영고성쇠 즉 우주 만물의 존재 현상을 알지 못한다. 마음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언행거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물의 마음은 우리가 마주 서는 존재자의 현상, 그것만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현상과는 다른 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형 색의 어떤 물의 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물은 아니요, 그러나 물과 함께 있으면서 물의 온갖 존재 현상이 그로부터 있게되니 영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은 동도 비동도 아니나 동정이 함께 있는 자리요, 시도 종도 아니나 시종이 함께 있는 자리요, 유도 무도 아니나 유무가 함께 있는 자리이다. 시간과 공간이 함께 있는 자리이니 시중이다. 그 복의 자리에서 만나는 것은 현전실재이나 그것은 눈앞에 마주 서는 물상이 아니요,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 자리에서만 그 현전실재는 물상을 가지고 존재자로 마주 선다. 복은 바로 현전실재의 자리로 유도 아니요 비유도 아니나 유무가 그로부터 나오고, 동도 비동도 아니나 동정이 그로부터 나오고, 시도 종도 아니나 시종이 그로부터 있게 되고, 오늘도 내일도 아니나 오늘과 내일이 그로부터 갈라진다. 이 복의 자리가 현전실재의 자리요, ‘지금 바로 여기’요, 철학함의 자리이다.

다. 우주와 무량세계
1) -과 존재
동양철학에서 ‘-’은 수 개념의 ‘하나’가 아니다. 수는 물상 개념이다. 물상은 둘로부터 시작한다. -은 존재 개념이다. 수는 쪼개지는 개념이지마는 존재는 쪼개지는 개념이 아니다. 수로서의 하나는 쪼개져 둘이 되지마는 –은 쪼개지지 않는다. 쪼개진다면 그것은 수 개념이요 존재 개념이 아니다. 수는 존재 개념이 아닌지라 아무리 쪼개진다 하더라도 수요, 존재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는 공허한 개념으로 아무 존재도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존재자에 의탁할 때만 실질적인 내용을 가진다. 수를 물상 개념이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수 개념은 돌, 나무, 꽃 등의 물상 곧 존재자를 한정한다. 그러나 존재 개념은 돌, 나무, 꽃 등의 존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으로 분리되어 마주 서는 물상도 아니요, 수 개념으로 한정되는 존재자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 자체일 뿐이다. 이러한 존재 개념이 –이다. 수에 의해서 파악된 존재자는 –이 아니다. -은 파악된 존재자가 아니요 수 개념에 의해 한정되는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은 어떠한 한정도 가지지 않는 존재 그 자체일 뿐이다. 이러한 존재를 태허라 하기도 하고, 한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무극이라 하기도 한다. 이 –을 선분으로 생각하여 끝과 끝을 이어 그림으로 나타내면 원이 된다. 원은 동양에서 존재요 우주를 나타내는 그림이다.

2) 태허와 우주
우주는 무량세계다. 지금까지 밝혀진 은하계의 수가 1천억 개나 되고 그 각각의 은하계는 또 수천억 개의 별과 행성이 에워싸고 있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의 양도 우주의 무량세계에서 보면 사막에서 한 숟갈 퍼낸 모래알의 양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그것으로 우주의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주만이 아니라 태양계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 중의 하나인 이 지구도 마찬가지로 무량세계다. (산과 바다, 나무, 풀, 꽃, 돌, 바위, 흙, 물, 짐승, 곤충 그리고 박테리아 등 미생물, 그 밖에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한들 나무는 종류가 있을 것이며 그 각각의 종류에는 무수한 수의 나무가 있을 것이다. 그 무수한 나무는 크기, 모양, 뻗은 가지의 굵기와 방향, 생김도 다를 것이다. 같은 종, 같은 수령의 나무라도 그늘에 있는 나무와 양지에 있는 나무가 다르고, 산비탈에 있는 나무와 평지에 있는 나무가 다르다. 어느 하나도 자기 이외의 나무와 같은 나무는 없다. 하물며 다른 종에 있어서는 얼마나 알고 있겠는가? 가령 소나무 하나를 안다고 했을 때, 그 무수한 소나무 중에 어떤 소나무를 안다는 것이며 그 소나무의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솔잎 하나도 모양 크기, 색깔, 굵기, 강도, 등등이 있을 것이며, 거기다 관찰자의 위치, 방향, 거리에 따라, 뿐만 아니라 관찰자의 관심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솔잎 하나에도 우주와 같은 무량세계를 담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우주만이 무량세계가 아니라 티클 하나도 무량세계라고 할 수 있다.) 무량세계로 말하면 티끌 하나가 작은 것이 아니요, 우주가 결코 큰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무량세계로 있는 것을 존재라 하고 우주라고 하는 것이다. 이 무량세계를 바다라고 하면 우리의 인식은 그 바다에 투망질을 하는 행위다. 이러한 일은 언젠가는 바닥이 드러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앎의 세계에서는 무량세계가 바닥을 드러내는 일은 없다. 이렇게 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무량세계를 존재라 하고 그러한 존재를 우주라고 하는 것이다.

3) 존재와 무량세계
어부가 그물질을 하다 보면 바다에서 고기를 다 잡아 올리는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의 세계에서 보면 그렇다. 이미 과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단계에 와 있다. 그러나 무량세계는 수 개념으로 한정되는 존재자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자는 한정됨으로 마주 서는 물상으로 수의 세계이지마는 존재는 수의 세계가 아니다. 과학이 수의 세계(존재자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면 학문의 세계에서는 무량세계가 없다. 무량세계의 무량은 무한량의 의미로 수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무량은 양이 없는 존재 즉 수 개념이 아닌 것으로 있는 존재라는 것으로 존재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자는 존재자들이라는 ‘들“의 수 개념이 붙을 수 있으나, 존재는 ’들‘을 붙여 말할 수 없는 개념이다. 앞에서 말한 –이 바로 그러한 존재 개념이었다. -을 태허라 한다. 태허는 존재자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 개념이라는 말이다. 태허는 무내무외로 있고 무시무종으로 있는 것을 말한다. 무내무외는 공간이 없다는 말이요, 무시무종은 시간이 없다는 말이다. 시간도 공간도 없이 존재하는 것이 태허다. 태허(존재)는 시간도 공간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태허는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도,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존재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굳이 시간과 공간으로 말한다면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있는 것은 존재 형식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존재자가 아니요 존재다. 존재는 존재 형식을 가지지 않는다. 존재 형식을 가지 않는다는 것은 무한하다는 것이며 이러한 존재의 무한을 태허라고 하는 것이다. 태허는 시간과 공간의 존재 형식을 가지 않는 만큼 물상으로 설명되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로서 가득한 존재 그 자체다. 우주가 곧 태허다. 무내무외로 있고 무시무종으로 있는 것이 우주요 그것이 곧 태허다. 존재 그 자체가 무량세계다.

2. 시간과 공간

가. 시간과 공간

1) 시간과 공간이란 무엇인가?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물상과 같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물상과는 별개로 독립해 존재하는가?
하늘과 땅 사이, 천지지간이 공간인가?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시간이 있어 흐른다는 것인가? 흐르는 것(변화)을 일러 시간이라 하는가?
흐르는 것을 변화라고 할 때 변화는 물상에서 얻어진 개념인가, 시간에서 얻어진 개념인가. 시간에서 어떻게 변화가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 얻어진 것이 아니요, 변화가 곧 시간이요 시간은 물상에서 얻어진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물상이요 시간은 물상을 떠나 따로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공간은 물상과 물상의 사이를 말한다. 하늘과 땅 사이, 이 산과 저 산의 사이, 이 나무와 저 나무의 사이, 물건과 물건의 사이를 말한다. 여기서 물건들은 물상을 말한다. 물상 없이 사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물상에 있어서 전후좌우 상하고저의 사이에서 공간이 문제가 된다. 공간은 부피 넓이 크기로서 말해진다. 이것은 모두 물의 상을 말하는 것이다. 있는 것은 물의 상이 있을 뿐이요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상 없이는 이러한 공간이 없으며 있다 한들 그러한 공간은 의미가 없으며 문제 삼을 대상이 되지 않는다. 공간은 물상을 문제 삼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상 만이요 공간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있는 것이 아니요, 있는 것은 오직 물상만 있을 뿐이다. 있다면 그것은 물상의 존재 모습으로 있는 것이요, 그렇게 있는 것을 존재 형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자의 존재 형식으로만 문제 삼을 수 있다.

2) 시간에 대하여

가) 인생
인생은 오늘을 살아간다. 10년을 살아도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ㅛ, 100년을 살아도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그 오늘 하루에 회한도 슬픔도 고뇌와 기쁨과 열락이 있다. 어제는 지나가 없고, 내일은 오지 않아 있는 날이 아니다. 인생을 살아간다 하나, 그 사는 인생은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것은 오늘 하루에 있다. 오늘에 있지 않은 세월이 60년이면 어떻고 그 이상이면 어떻겠는가. 하지만 인간은 사념 속에 사는지라 어쩔 수 없이 지난날을 오늘로 끌어다 놓고 연륜을 말하고 인생을 말하게 되는가. 그 인생을 무어라 해야 하나. 아름답다 하기엔 너무 아프고, 억울하다 하기엔 얼룩진 자국들이 너무 아롱지다. 어느 성인은 선도 악도 저지르지 말라 했다지만, 붓길 한 번 간 일이 없는 백지 한 장이 무슨 그림일 수 있으며 회한의 눈물 한 번 흘리지 않은 인간이 무슨 인생을 살았다 하랴.
인생은 한폭의 그림이다. 마음을 상처 내고 서럽도록 파묻혀보는 영혼의 흔적들이다.

나) 나이
나이는 살아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버린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다는 것은 살아버린 삶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써버린 돈이 많아 부자라고 내세우는 것과 같다. 나이는 탕진해버린 재산과 같다. 그 재산을 계산하는 것이 부질없는 것처럼 살아버린 삶(나이)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다) 수명
 사람의 평균 수명이 70을 넘어 80을 바라본다고 한다. 그러나 45세일 때의 옛날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달력과 시계에 의한 시간 개념으로 말하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은 시계의 자판 위에 있는 것이 아니요, 세월은 달력의 숫자 속에서 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삶 속의 생활과 우리의 관념 속에 있는 것이다. 시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그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붙들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삶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서 시간을 말하기도 한다. 과거는 현재 속에서 기억으로 있는 것이요, 과거(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 또한 마찬가지로 현재의 관념 속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관념이나 기억은 나의 생활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만들어진 기억이나 관념이 생활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하였을 때(객관화 시켰을 때)를 일러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공허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환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 환상을 실체로 여겨 수(시계나 달력)의 개념으로 치환시켜 수로서 인식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다. 이 수로서 인식되는 시간은 생활 속에 있는 시간과는 무관하다. 왜냐면 수(시계)로서 인식되는 시간은 길고 짧음 즉 양이 일정하지만, 생활 속의 삶의 시간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이(수)로서 수명의 길고 짧음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45세의 수명이 80세의 수명보다 길수도 있다. 급할 것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사간과 조급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시간이 같을 수 없다.

라) 과거와 미래
과거와 현재, 미래 그것은 시간의 전체성, 영원성을 말하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 또는 그 흐름의 방향(과거->미래)을 나타내기도 한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시간을 물처럼 실체로 파악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시간은 흐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시간이 흐른다고 증명하기만큼 힘들지만) 과거나 미래는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살아버린 삶의 기억으로서 현재에 있는 것이요, 과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로 현재 속에 있다. 이것이 실재로서 있는 것과 시간으로서 있는 것의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과거나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요, 현재의 삶으로서만 있다. 이것이 실재로 있는 살아 있는 시간이다.

마) 시간의 그림
현재 속에서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 이것이 살아 있는 시간으로서의 과거요 미래다. 이것을 도표로 그린다면 ‘과거<-현재->미래’ 또는 ‘과거->현재<-미래’로 그릴 수 있다. ‘과거<-현재->미래’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고, ‘과거->현재<-미래’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서만 살아 있는 시간 개념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 도표다. 흔히 시간 도표를 ‘과거->현재->미래’로 그리고 있으나, 이것은 시간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때다. 이 도표대로라면 과거가 지난 것으로 있고 미래가 오지 않는 것으로 있는 것이 된다. 이런 과거와 미래는 죽은 과거와 죽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요, 죽은 시간(없는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와 미래는 시간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안에 살아 있을 때야만 시간은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은 현재로서만 살아 있다.

바) 시간 흐름의 방향
인식의 주체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나’이므로 시간의 흐름 방향은 지금 바로 여기가 기점이 된다. 이로부터 <- ㆍ ->로 시간의 흐름 방향을 그릴 수 있으며 ㆍ가 지금 바로 여기로서 기점이 된다.

사) 시간의 기점과 측정
시간은 그 시작과 끝을 알 수가 없고, 그 길이의 양도 측정할 수 없다. 그래서 시도 종도 없다고 한다. 무한하다고도 하고 영원하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시작의 기점을 잡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고, 그 양을 측정하지 않으면 생활 안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다.
그 기점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요 오늘이다. 그리고 그 측정은 일반적으로 시계로 한다 할 수 있겠으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는 바로 나의 마음에서 측정된다. 그러므로 오늘이 기점이 되어 어제와 내일이 문제가 되고 현재가 기점이 되어 과거와 미래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기점은 늘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있는 오늘로 옮겨가고 내가 살아 있는 현재로 옮겨간다. 시간의 기점이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시간의 측정 단위도 나의 생활, 나의 삶 속에서 길고 짧음이 정해진다. 이것은 공간도 마찬가지다. 지금 바로 여기 내가 있는 자리가 기점이 되어 멀고 가까운 거리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있는 오늘 지금이 시간의 기점이 되고, 내가 있는 바로 여기가 공간의 기점이 된다. ‘지금 바로 여기’가 바로 시ㆍ공간의 기점이다.

아) 주역의 시간
한마디로 동양에서의 시ㆍ공간은 언제나 생활 속에서, 나의 삶 속에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반가운 사람과 마주 있으면 시간은 빨리 가고, 미운 사람과 있으면 시간이 더디 간다. 이것은 공간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의 학교 운동장은 크기만 하고, 어른이 되었을 때의 그 운동장은 작기만 하다. 시간과 공간이 물상과 생활을 떠나 따로이 독립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객관적 존재로서의 절대시간, 절대공간은 동양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 시계와 시간
사실의 시간과 공간은 시계나 잣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시계를 만들어놓고 그 시계의 자판 위에서 시간을 읽어 나간다. 그로부터 시간은 자판 위에 있게 되고 실제 시간은 없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사실로서 길게 체험되는 시간이라도 시계 안에 들어오지 않은 시간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착각에서 오는 것으로 시간이 아니라고 한다. 직접 마주 서는 사실의 시간은 없어지고 시계의 자판 위에만 있게 된다. 집행을 앞둔 사형수의 하루는 짧기만 하고, 보고 싶은 사람을 고대하는 시간은 하루가 3년처럼 길어진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자를 만든 이후 거리는 잣대의 눈금 위에 있게 되고 도로상에 있는 사실의 거리는 없어지고 만 것이다. 우리의 앎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정의를 내려놓고 정의 속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사실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으로 있게 된다. 즉 이것은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그물 안에 들어온 고기만을 고기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정의는 어부가 던지는 그물과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그물을 치더라도 바다 속의 물고기를 다 잡아 올릴 수 없는 것처럼, 정의로서 인간의 앎의 세계를 다 끌어들일 수는 없다.

3) 공간에 대하여
가) 길
길을 걷다보면 같은 거리를 가더라도 초행길은 확실히 멀고 늘 다녀본 길은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밤길은 낮에 가는 길보다 멀고, 내키지 않은 심부름 길은 평소보다 두 배나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실제로 내게 와닿는 길의 멀고 가까움이요, 생활 속에 있는 사실의 길이다. 그러나 그 멀고 가까움을 길에서 찾지 않고 잣대의 눈금 위에서 찾을 때, 그 거리는 사실에서 떠나 개념으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개념 속의 길은 밤길도 소용이 없고, 초행길도 멀어질 수가 없다. 이러한 공간이 절대공간이다. 이러한 절대공간 속에서의 길은 사람이 살아가는 실제의 생활 속에는 없다. 그것은 오직 잣대의 눈금 위에만 있을 뿐이다. ‘지척이 천리’라는 말을 한다. 길은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길이라는 말이요, 그 멀고 가까움도 잣대의 눈금 위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생활 속에서 결정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 운동장
초등학교를 다닐 때 운동장은 크기만 하던 것이 어른이 되어서 찾았을 때는 그렇게 작을 수가 없고, 건물 또한 초라하기가 이를 데 없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그 크고 작음은  옛날과 오늘이 같지 않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이며, 사실의 모습인가? 옳은 것은 언제나 하나고, 사실은 두 가지 모습으로 있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에 본 것이 사실인가, 어른이 되어서 본 것이 사실인가 그 선택은 쉽지 않을 것이며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가지가 다 사실이요 진실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옳은 것은 하나이며 진실은 한 가지 모습으로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즉 진리는 하나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어린아이와 어른이라는 것을 떼어버리고 옳은 것을 찾는다면 그러한 옳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그 존재하지도 않는 옳음에 매달려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나 어른이 되었을 때나 운동장의 크기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크거나 작거나 간에 어느 하나가 옳은 것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원하는 그런 옳음은 실제로는 있는 것이아니요, 있는 것은 오직 크게 있고 작게 있는 운동장으로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실재하는 공간이요, 우리 생활과 함께하는 공간이다. 모든 공간은 그렇게 있다.

다) 공간과 사이
공간은 사이를 말한다. 이것과 저것의 사이 그것이 공간이다. 사이는 어떤 존재자, 즉 사물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이를 공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은 말할 수 없으며, 반드시 어떤 존재자를 전제로 하고서야만 공간은 설명할 수가 있다. 간은 사이라는 말이요, 사이는 물상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사물에 의지하지 않고 사이가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이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실은 물상이다. 그러므로 물상이 곧 공간이 된다. 공간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는 물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이를 문제 삼을 뿐이다.
 
라) 거리
거리도 마찬가지다.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물상이 있을 뿐이다. 그 물상이 멀고 가까이 있음에 따라 작게도 크게도 보인다. 물상의 대소가 거리에 있어 주어진다고는 하나, 대소가 바로 물상이니 물상을 떠나 거리를 말할 수 없다. 설혹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거리는 공허한 것이요 있는 것이 아니다.
마) 자
우리는 자를 가지고 물건의 길이, 높이 넓이를 잰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잴 뿐 길이나 높이나 넓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눈금을 그은 단위로서만 존재한다. 그 눈금에 따라 길고 짧음을 말할 수는 있으나, 그 길고 짧음은 사물에 있는 것이요 자의 눈금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눈금은 하나의 수치만을 나타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대소 장단은 사물에 있는 만큼 사물에서 결정되는 것이요, 눈금만으로는 그것이 아무리 수치가 많다 하더라도 그저 수치일 뿐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한다. 그 수치는 변화하지 않으며 어떠한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수치는 고정되어 있지만, 사물의 대소 장단은 수치로서 고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척이 천리보다 더 멀기도 하고, 가을 털끝이 태산보다 더 클수도 있는 것이다. 자의 눈금은 일정하지만 사물의 대소 장단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티끌 하나도 수 개념으로는 무한세계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공간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자의 눈금은 죽어 있는 공간이요, 사물의 대소 장단은 살아 있는 공간이다. 이 살아 있는 공간이 우리 생활과 함께하는 실질적인 현실의 공간이다.

나. 시간과 공간의 그림

1) 굴렁쇠 그림
굴렁쇠 그림 즉 원은 무한자를 의미한다. 원은 시와 종이 없다. 무한자를 존재 형식으로 말할 때 무시무종, 무내무외라 한다. 무시무종은 시와 종이 없다는 것으로 시간의 무한성을 말하고, 무내무외는 분할이 없다는 것으로 공간의 무한성을 말한다. 시간은 원래 처음과 끝이라는 시와 종이 없고, 공간은 원래 안과 밖이라는 연장이 없다. 시종이 없는 시간과 내외가 없는 공간이 함께하고 있는 것을 우주라고 한다. 우주의 우는 공간을 말하고 주는 시간을 말한다. 존재형식으로 말하면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요, 존재로 말하면 무한자가 우주다. 그것을 그림으로는 처음도 끝도 없는 원으로 그린다.
굴렁쇠는 굴러가지 않으면 넘어진다. 소년이 그러한 굴렁쇠를 넘어지지 않도록 굴리고 있다면 우주라는 굴렁쇠에서 소년은 바로 우리의 의식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우주는 무한자의 굴렁쇠가 되어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굴렁쇠는 멈추면 넘어진다. 넘어진 굴렁쇠는 무한성을 잃고 하나의 둥그런 물상이 되어버린다.
무한자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아 머물게 되면 시와 조이 있게 되고 내와 외가 있게 되어 물을 이루게 된다. 물은 시간과 공간의 존재 형식을 가지는 존재자를 말한다.

2) 하늘과 땅의 그림
하늘과 땅을 일컬어 천원지방이라 한다. 원은 둥글다는 것이요 방은 모가 났다는 말이다. 여기서 원은 구를 의미하고 방은 두부모처럼 생긴 정육면체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원과 방은 이러한 하늘과 땅의 직접적인 형상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물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상에서 시간은 변화요, 공간은 형상이다. 하늘에서 일월성신이 운행하는 변화 현상을 보고 끊임없는 변화를 원으로 나타내고 땅에서 마주하는 만물들이 머물러 어느 것 하나 각지고 모나지 않은 것이 없어 그 형상을 바이라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은 변화를 나타내고 방은 형상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시간은 변화하는 물상으로 말하고 공간을 머물러 있는 물상으로 말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은 물상에서는 변화와 형상이요, 이것을 원과 방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무한자와 유한자라고도 할 수 있다.
원과 방은 하늘과 땅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하늘의 둥그런 모양과 땅의 네모진 형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무한성과 땅의 유한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과 방은 하늘과 땅을 의탁해 그 형상보다는 모든 물상의 존재형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에서 하늘과 땅이 다루어질 때 그 형상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하늘과 땅은 만물 곧 존재자를 설명하는 데서 문제가 된다. 만물이 자리하는 공간적 설정으로서는 ‘사이’로서 천지가 문제가 되고, 시간적 설정으로서는 변화로서 천지가 문제가 된다. 하늘과 땅은 천지지간이라는 ‘사이’를, 즉 공간 설정에서 문제가 된다. 그 ‘사이’라는 공간에 만물이 존재한다. 그 만물, 즉 존재자가 존재하는 가장 큰 공간이 하늘과 땅 사이이다. 여기서 하늘과 땅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직 의미는 ‘사이’라는 공간에 있다. 그 사이는 모든 존재자가 있는 공간이며, 하늘과 땅은 그 공간 설정으로 주어지는 하나의 형식 개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늘과 땅이라는 물상의 형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형식이라는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이’라는 동양적 공간 개념의 특징이다.
시간과 공간은 항상 존재자에게서 문제가 된다.
하늘과 땅은 공간이 가지는 공간 형식이다. 이 형식 속에서 만물이 존재하는 공간이 설정된다.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공간적 존재 형식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존재 형식을 가진다. 그 시간이라는 존재 형식이 또한 ‘사이’라는 공간 형식을 가짐으로써 가능하다. 바로 여기에서 하늘과 땅은 공간이 가지는 공간 형식일 뿐 아니라 시간이 가지는 시간 형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만물이 존재하는 공간 형식일 뿐 아니라 시간 형식으로, 하늘과 땅은 모든 존재자의 존재 형식으로 다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철학에서 문제 삼는 하늘과 땅이다. 그러므로 원과 방은 모든 존재자의 존재 형식을 하늘과 땅이라는 물상을 빌려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원은 한없는 물상의 변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요, 방은 유한한 물상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변화는 시간적 물상의 존재 현상이요, 형상은 머물러 있는 공간적 물상의 존재 현상이다.

3) 시간과 공간의 그림
물상을 떠난 순수 시간과 공간을 생각한다면 시간은 무시무종으로 원으로 표시되고 공간은 무내무외로 면으로 나타낸 구의 그림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원에서는 기점이 없어서 무시무종이고 구에서는 중심이 없어 내와 외를 말할 수 없다. 즉 시간은 원래 시종이 없고 공간은 원래 내외(분할)가 없다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과 공간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시공간 속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야 의미가 있고 공간은 분할이 있고 안과 밖이 있어야 공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의미를 가지기 위하여서는 그것들의 기점을 잡아야 한다. 그 기점으로부터 시간은 그 길이와 양을 말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지고 공간은 멀고 가까움의 거리 전후, 좌우를 말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한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것이 기점이다. 그 기점이 ‘지금 바로 여기’다. ‘지금’은 시간의 기점이요 ‘여기’는 공간의 기점이다. 즉 시간의 기점이 바로 공간의 기점이요 공간의 기점이 바로 시간의 기점이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어 별개로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바로 여기’ 즉 내가 서있는 자리가 바로 시ㆍ공간의 기점이 된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날마다 달라진다. 그러므로 기점도 달라진다. 기점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시간에는 정해진 기점이 없고 공간도 고정된 기점이 없다. 그것이 앞에서 기점 없는 시간 그림과 공간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늘 옮겨가는 내가 서 있는 자리, ‘지금 바로 여기’가 기점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도 이 기점으로부터 흐른다.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로 흐른다. 그리고 시간은 현존성으로 언제나 현재로서만 있고 과거나 미래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기억이요 시간이 아니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로 현재에 있다. 그러고 보면 이것을 과거->현재<-미래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 속에서만 실재하는, 시간 개념으로 존재할 수 잇다는 말이다. 이것은 현재가 과거와 미래를 만들어 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공간의 거리 위치도 내가 선 자리(지금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된다. 내가 서울에 있으면 부산이 먼거리요 내가 부산에 있으면 부산은 먼거리가 아니다. 전후좌우 동서남북도 마찬가지로 내가 있는 자리에서 문제가 된다. 

4) 물상의 그림
시간과 공간이 존재자의 존재 형식이다. 그 존재 형식인 시간과 공간을 우리는 말할 수는 있으나 마주 설 수는 없다. 우리가 대상으로 마주 서는 것은 오직 물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물상은 시간과 공간이 아니면 마주 설 수 없고 물상이 아니면 시간과 공간 또한 문제삼을 수가 없다. 물상에서 문제삼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변화와 형상이다. 변화하는 물상이 시간이요 머물러 있는 물상이 공간이라는 말이다. 물상에서 시간은 변화요 공간은 형상이다.
모든 존재자는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요 공간만으로 존재하거나 시간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인식 상에서 두 가지 물상으로 분리되어 마주 설 뿐이다. 인식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지 않고는 물상을 마주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분리되지 않은 실재는 마주 세울 수 없으며 인식할 수도 없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함으로써만 물상으로 마주 선다. 이러한 물상으로 마주 세우는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인식이라 한다. 그러므로 인식함으로써만 물상은 존재한다. 그 물상은 시간적 물상과 공간적 물상으로 마주선다. 그러나 인식 상에서만 그것은 분리될 뿐, 실재로는 공간적 물상에 시간이 있는 것이요 시간적 물상에 공간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다. 존재 형식으로서의 시간과 공간

1) 시간과 공간의 기점
앞에서 시간과 공간의 기점은 ‘지금 바로 여기’라는 것을 보았다.
만일 그 시간을 말하는 과거 현재 미래를 과거->현재->미래로 표시한다면 이것은 시간의 흐름 방향을 나타낸 것일 뿐 기점이 없다. 과거의 처음은 어디고 미래의 끝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그 시작과 끝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시간을 무시무종이라 한다. 그러나 그 시작의 기점을 잡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고 양을 측정하지 않으면 시간을 우리 생활 안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면 그 기점이 되는 것이 ‘지금 바로 여기’가 되고 그 기점은 한 자리에 머물러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나타낸 시간의 방향이 과거<-현재->미래가 된다. 또한 그 과거는 살아버린 삶의 기억으로 현재에 있고 미래 역시 현재의 관념 속에 있는 것이므로 과거->현재<-미래로서 표현될 수도 있다. 즉 이 말은 시간은 언제나 현재로서만 있고 과거나 미래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현재가 과거나 미래의 기점이요 오늘이 어제와 내일을 기점이라고는 하나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사실 시간의 기점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면 시간 개념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시간이라는 것은 시와 시 사이를 말한다. 그러고 보면 현재와 오늘은 시간이요 시간은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현재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즉 지나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은 채 머물러 있는 시간은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 시간은 없다. 만일 시간이 없다면 현재도 오늘도 있을 수 없다. 없는 것이 기점일 수는 없다. 그러나 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것으로 있다. 그 시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으로서 있는 것이다. 그 시에서 시간을 만들어간다. 자정이 그러한 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시가 시간의 기점이다. 과거와 미래가 갈라지는 곳이 오늘이라면 오늘이 그 시로서 기점이다. 그 기점을 주역에서 복이라 하였다. 그 복이 존재자의 기점이고 이 기점에서 시간과 공간이 생겨나고 그 시간과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물상이요 존재자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의 기점은 곧 존재자의 기점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을 서로 수직으로 교차하는 선분으로 나타냈을 때 두 선분이 교차하는 지점이 기점(지금 바로 여기)이 된다. 그 기점에서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있게 되고 공간은 원근이 있게 된다. 그 점에서 멀리 갈수록 먼 과거와 먼 미래가 되겠고 그 기점으로부터 멀고 가까운 거리가 생겨난다.
우리는 현재와 오늘을 살고 있다. 그것을 시간으로 말하면 ‘지금’이고 공간으로 말하면 ‘바로 여기’다. 이것은 내가 기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항상 문제가 된다. 동양철학에서 나를 찾는 일이 늘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모든 것의 기점이 되는 나를 찾지 않고는 아무것도 문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시간 인식과 공간 인식
우리는 시계의 자판 위에 그어져 있는 눈금에 따라 시간을 읽는다. 그 눈금은 일정하게 그어져 있고 밤과 낮이라 하여 달라지는 일이 없고 어린아이와 어른이라고 하여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구에게서나 어디서나 시간을 일정하게 인식한다. 이것은 공간에 의한 시간 인식이다. 그러나 짧게 느껴지는 시간과 길게 느껴지는 시간에 따라 눈금을 긋는다면 자판 위의 눈금 사이는 달라진다. 이것은 시간에 따라 인식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에 의한 시간 인식과  시간에 의한 공간 인식, 여기서 시간과 공간의 인식이 문제가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시간 즉 일정한 공간에 의해 파악되는 시간은 우리의 의식 현상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이러한 인식 밖의 시간과 공간을 물상과 독립하여 별개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이다. 이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을 가지고 모든 존재자의 존재 형식을 삼아 물상 파악의 기반을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과 공간은 사실로는 있는 것이 아니며 물상 파악의 일환으로 인식된 물상에서만 존재 형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시간과 공간이다. 이러한 절대시간과 공간은 모든 존재자를 일정하게만 이해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물상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요 물상 파악의 주체적 의식 현상으로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을 대 우리 앞에 마주서는 존재자의 세계는 달라진다. 운동장이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한 것이 그 때문이요 세월이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한 것이 그 때문이다. 모두 현장에서 사실로 주어지는 물상에서 체험되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 때 인식한 시간과 공간도 사실이요 어른이 되어 인식한 시간과 공간도 사실이다. 어느것은 착각이요 어느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가 없다. 어린 아이에게는 어린 아이의 시간과 공간이 있고 어른에게는 어른의 시간과 공간이 있다. 그러나 절대시간 절대공간 속에서는 이 두 가지를 다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시계나 잣대의 눈금으로 인식한 시간과 공간이 아니므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계나 잣대의 눈금으로 인식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은 물상과는 무관한 시간과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시간과 공간의 틀 속에 물상을 가두었을 때 인식의 주체는 없어지고 일그러진 물상만이 뎅그라니 남아 있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물상과 함게 주체적 의식 현상으로 있는 것이요 물상을 떠나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물상 파악의 주체는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나’다. 그러므로 나에게서 만들어지는 의식 현상으로 있는 것이 실질적인 시간과 공간이다. 다시 말해서 물상에서 인식된 시간과 공간만이 살아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3) 물상 파악과 시ㆍ공간

가) 의식 현상과 시ㆍ공간
있는 것은 물상 뿐이다. 물상의 형상을 규정함으로써 그 형상을 알게 하는 것이 공간 개념이요 변화를 규정함으로써 그 변화를 알게 하는 것이 시간 개념이다. 이러한 규정 속에서 존재하는 형상과 변화를 가지고 물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자를 알게 하는(물상으로 마주 서게 하는) 규정 개념이요 존재 개념은 아니다. 우리가 존재 문제에 있어서 존재자보다 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먼저 말하게 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존재자를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존재 형식을 말하지 않고 존재자를 말할 수는 없다. 이로부터 시간과 공간이 존재자에 앞서 선재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자 밖에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이 없는 존재자는 상정할 수 있으나 존재자 없는 시간과 공간은 있을 수 없다. 바로 여기에서 존재 형식 곧 시간과 공간은 물상의 존재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물상의 존재 현상이란 일종의 의식 현상이기도 하다. 물상은 파악함으로서만이 마주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파악된 존재 현상을 물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물상을 형상으로 파악한 것이 공간이요 변화로 파악한 것이 시간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물상을 파악하는 하나의 의식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 존재 현상과 시ㆍ공간
시간과 공간은 물상의 존재 형식으로 주어지는 의식 현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앞에 마주 서는 물상이 의식 현상 밖에 객관적 대상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객관적으로 마주 서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서 있지도 않은 것을 물상으로 문제삼을 수 없을 것이며 시간과 공간을 그 물상의 존재 형식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물상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변화와 형상을 가진 객관적 대상으로 마주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마주 서는 물상은 파악된 존재 현상이다. 형상이 있고 대소 장단이 있으며 움직이고 변화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파악됨으로써 마주 서는 존재 현상들이다. 모든 물상은 이렇게 마주 선다. 그러므로 물상 곧 존재 현상은 파악됨으로써 그 파악 내용으로 마주 서는 의식 현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마주 서는 물상은 비록 의식 현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주체에서 떠나 객관적으로 대상 즉 물상의 존재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객관화된 의식 현상이 물상으로 마주 서는 것을 객관적 존재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물상으로 마주 서는 의식 현상과는 달리 물상 파악의 일환으로 문제가 되는 존재 형식으로 그 존재 형식은 대상으로 마주 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직접 마주 설 수는 없다. 그러나 물상을 규정함으로써 변화와 형상으로 마주 서게 한다. 이렇게 물상으로 마주 세우는 일련의 과정을 파악이라 하고 그 파악된 존재 현상 속에서 물상의 존재 형식으로 문제되는 것이 다름 아닌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이 물상의 존재 형식이요 시간과 공간이 물상과 함께 있는 것이요 함께 있는 것이라면 시간과 공간도 물상과 함께 객관적 대상으로 마주 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물상은 있으나 시간과 공간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주 서는 것은 물상이요 시간과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식상의 형식으로만 주어질 뿐이다. 즉 형식 개념이요 존재 개념이 아니다. 대상은 상을 가지는 것이라야만 마주 설 수 잇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을 가지고 마주 서는 물상이 객관적 존재 현상이라고는 하나 인식 내용으로 마주 서는 의식 현상인 만큼 그것이 인식 주체와 무관한 존재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물상은 주체의 의식 현상이 거듭 객관화되면서 새로운 물상으로 마주 선다. 대상은 아는 만큼 마주 선다는 말은 그래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함의 요구가 제기된다.

라. 시간과 공간의 분리와 상

1) 시간과 공간의 분리
시간과 공간은 원래 분리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함께 있다. 그러나 함게 있는 자리에서는 시간과 공간은 소멸해버린다. 그때를 현전이라 한다. 그 현전의 자리가 ‘지금 바로 여기’이다. 여기서 ‘지금’은 시간이요 ‘여기’는 공간이라 할 수 있지만 ‘지금 바로 여기’는 시간과 공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소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자정에 해당하는 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기점으로 시간이 소멸한 현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는 바로 그 시와 함께 공간도 소멸한 현전이다. 이것을 하나의 점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과 여기를 시간과 공간이라 하더라도 함게 있는 것이고 보면 시간과 공간은 소멸해버리고 없는 것이다. 함께 있는 것이라면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기 전이라 할 수 있으니 분리되고 나서야 그 분리된 것으로 시간과 공간이 있게 되는 것이므로 분리되기 전은 시간과 공간이 없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기 전 자리, 시간과 공간이 없는 자리가 ‘지금 바로 여기’다. 그리고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현전실재다. 이러한 현전 실재는 아무런 상도 가지지 못하고 무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가 마주 설 수 있는 물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시간과 공간의 분리가 문제된다. 시간과 공간이 함께 있을 때는 소멸하고 분리시켰을 때만 있게 된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것은 마주 서는 물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킨다는 것은 물상을 마주 세운다는 것이요 그것은 곧 인식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의 분리는 곧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상은 인식함으로써 마주 서는 것이며 인식은 다름 아닌 시간과 공간의 분리이다. 그렇게 마주 서는 물상을 시간적 물상, 공간적 물상이라고 한다. 모든 물상은 이 두 가지로 마주 선다. 공간으로 마주 서는 물상을 형상이라 하고 시간으로 마주서는 물상을 변화라 하는 것이다.
현전실재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시간과 공간으로 분리되어 물상으로 마주 서는 것을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는 것은 물상이요 현전실재를 아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분리는 바로 이러한 물상의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2) 시간과 공간의 상
시간의 상은 물상의 변화이고 공간의 상은 물상이 가지는 형상이다. 시간의 상이 변화하는 물상을 마주 서게 하는 것이라면 공간의 상은 형상을 가진 물상을 마주 서게 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변화하는 물상의 존재 형식이요 공간은 불변(형상)하는 물상의 존재 형식이다. 공간의 상이 곧 물상의 형상이다.
모든 물상은 시간의 상인 변화와 공간의 상인 형상으로 우리 앞에 마주 선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물상의 존재 형식으로 문제가 되며 그 존재 형식으로 변화하는 시간적 물상과 머물러 형상을 가지는 공간적 물상을 파악하게 된다.

3) 죽어 있는 시간과 공간

가) 죽어 있는 시간 – 절대시간
 죽어 있는 시간은 시계의 자판 위에서 인식되는 시간을 말한다. 시계는 사람이 만든 기계다. 기계는 동일 반복의 특성을 가진다. 이것은 불변의 법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시계에 의해 만들어진(인식된) 시간은 일정하고 언제나 동일한 불변의 시간으로 존재한다. 일정한 눈금으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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