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 시각) 북한과 무역·금융 거래를 하는 제3국의 개인과 기관을 제재할 수 있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전면 시행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핵과 미사일 도발을 강행하는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중국·러시아와의 정면 충돌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미국은 앞서 지난 2015년까지 이란에 대해 세컨더리 보이콧을 시행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뉴욕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이번 행정명령은 북한과 상품·서비스·기술을 거래하는 기관과 개인을 겨냥한 것”이라며 “외국 금융기관들은 북한과 거래하든지 아니면 미국과 거래하든지 분명히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새 행정명령이 치명적인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북한의 수익 원천을 차단할 것”이라며 “(북한에 대한) 관용은 이제 끝나야 한다”고 했다. 그는 22일에는 “미국에 사상 최고의 대응 조치를 하겠다”고 공언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향해 ‘미치광이(mad man)’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 글에서 “김정은은 자기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 분명한 미치광이”라며 “그는 전례 없는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번 행정명령은 북한과의 중요한 무역 거래에 관련된 외국 금융기관을 미 행정부가 제재할 수 있도록 했다. 북한과 거래하는 금융기관을 달러화 거래에서 배제해 국제 금융시장에서 퇴출시키겠다는 것이다. 또 북한의 항구와 공항을 다녀온 선박과 비행기는 180일 동안 미국 입항을 금지했다.
북한의 건설, 에너지, 어업, 정보기술(IT), 의료, 광업, 섬유, 운송 산업과 관련 있는 기관·개인을 제재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어떤 나라의 어떤 은행도 북한 김정은의 파괴적 행동을 도와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의 경제전쟁을 유발할 수도 있는 이 행정명령을 강행한 것은 북핵 문제에선 타협이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대한) 관용은 이제 끝나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이번 조치는 과거 대(對)이란 제재와 유사하다. 미국은 1996년부터 이란에 대한 각종 경제 제재를 했지만 핵개발을 막을 수 없자 2010년부터 이란의 최대 수출품인 석유 수출과 이란 금융기관 전체에 대한 제재를 본격화했다. 이후 이란의 원유 수출은 반 토막 났다.
이란은 경제난에 시달리다 협상장으로 나와 2015년 미국과 비핵화를 위한 합의를 했다.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를 통해 북한의 최대 돈줄인 석탄 등 광물 수출을 막은 것은 지난 2012년 이란의 석유 수출을 차단한 것과 비슷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행정명령을 통해 북한과 거래하는 해외 모든 금융기관을 제재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란의 모든 금융기관을 ‘자금 세탁 우려 기관’으로 지정해 해외 금융기관과 거래를 봉쇄한 것과 같은 조치이다.
하늘길과 뱃길을 막은 방법도 유사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행정명령에서 북한 항구와 공항을 이용한 선박과 항공기는 180일간 미국에 들어올 수 없도록 했다. 미국은 이란에 대해서도 이란에 입항하는 선박과 선박 소유자·운영자 리스트를 미 의회에 보고하도록 해 사실상 기피하도록 만들었다. 한마디로 이란을 쥐어짰듯이 북한을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이란 사례를 보면 미국은 중국 은행 등에 대한 과감한 제재를 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지난 2012년 이란과 거래했다는 이유로 중국의 쿤룬은행을 제재했다. 미국은 쿤룬은행의 미국 내 금융거래를 중단시켜 사실상 국제 금융망에서 퇴출시켰다. 또 같은 해 중국 국영 석유업체인 주하이전룽공사가 이란에 가솔린을 공급했다는 이유로 미국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없도록 했다.
미 의회는 중국 대형 은행에 대한 제재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에드 로이스 미 하원 외교위원장은 전날 “중국초상은행과 농업은행이 수십억달러에 이르는 북한의 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증강하는 데 필요한 현금을 지속적으로 보내주고 있다”며 제재를 요구했다. 미 의회는 두 은행을 포함해 중국공상은행 등 열두 은행에 대한 제재 검토를 요구했다. 미국 언론들은 이번 행정명령이 2005년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 제재와 비슷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은 2005년 마카오에 있는 BDA가 북한의 불법 자금 세탁 창구로 이용된다는 이유로 미국과의 거래를 중단시켰다. 이때 미국과의 거래 중단을 우려한 중국의 24개 은행도 북한과의 금융 거래를 중단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행정명령은 북한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포괄적이고 강력하다”면서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킨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미국 외교·안보팀은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맞춰 대북 압박 강도를 높였다.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외국 금융기관은 미국과 거래할지, 북한과 거래할지를 선택할 수 있겠지만 둘 다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이날 “북한이 핵·미사일 포기 선언을 해야 (대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중국은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 행정명령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혔다. 중국 외교부 루캉 대변인은 22일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틀에서 벗어난 독자 제재에 반대해왔으며 이는 명확하고 일관된 입장"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