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6·12 정상회담 이후 8개월 만에 열린 2차 미·북 정상회담이 28일 아무런 합의도 없이 결렬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날 베트남 하노이에서 이틀째 만남을 가졌지만 합의문 채택에 실패했다. 북한 비핵화와 미국의 상응 조치(제재 완화)를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이다. 외교가에선 "'빅딜'도 '스몰딜'도 아닌 '노딜'(no deal) 회담"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날 회담은 오전 9시(현지 시각)부터 단독 정상회담, 확대 정상회담 순으로 진행됐다. 이어 업무 오찬과 합의문 서명식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두 정상은 확대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와 제재 완화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 업무 오찬과 서명식은 취소됐고 두 정상은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2월 28일 북미 2차 정상회담이 베트남 하노이 소피아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열리고 있다. 이날 북미 양측은 북한 비핵화와 대북제재 해제와 관련 합의문을 내지 못한채 헤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북한은 제재 완화를 요구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며 "(북이) 우리가 원하는 비핵화를 줘야만 우리도 제재 완화를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영변 핵 시설 외에 은닉된 우라늄 농축 시설 등 다른 핵 시설 폐기를 요구했고, 북한은 "모든 제재를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결렬 직후 백악관은 "건설적인 만남이었고 (3차) 회담을 고대한다"고 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빨리 열릴 수도 있고, 오랫동안 안 열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마이클 코언 변호사의 의회 증언 등으로 정치적 코너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제재 완화를 통째로 얻어내려던 김정은의 베팅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했다.
외교가에선 한동안 미·북 관계 경색 국면이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은 "수령의 체면을 심하게 구겼으니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내부적으로 숙청 가능성이 있고, 대외적으로는 미국 책임론을 거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날 밤늦게까지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전용기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25분간 전화 통화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대화해서 그 결과를 알려 달라"며 중재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청와대가 전했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만나 심도 있는 협의를 계속해 나가자"고 했다.
2·28 하노이 2차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로 끝난 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 섰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 때 보여준 상기된 표정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당초 이날 기자회견은 오후 3시 50분(현지 시각)으로 예정돼 있었다. 기자들은 오전 11시쯤 모여 보안검색을 마치고 오후 1시쯤 기자회견장인 JW 매리엇 호텔에 거의 도착했다. 이 무렵 회담이 결렬되고 기자회견이 오후 2시로 당겨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전날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찬 전 회동에서 보여준 긍정적인 분위기와 대비된 결과라 기자들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연단에 선 트럼프 대통령은 느닷없이 인도-파키스탄 충돌 소식을 전했다. 이어 베네수엘라 문제를 거론했다. 그러고 나서야 북한 이야기를 꺼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 매우 생산적인 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합의문에 서명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우리가 (협상장에서) 걸어나와야 하는 시점"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대에 같이 나온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마이크를 넘겨 추가 설명을 하도록 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미국은 (북한에)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면서 "김정은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이 모두 진전을 이뤘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 합의를 이룰 수는 없었다"면서 "그 합의를 앞으로 몇 주 내에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제재 완화 요구가 결국 이번 정상회담이 깨진 결정적인 이유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향후 "제재를 더 강화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트럼프는 회담 결렬이 자신의 결정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미·북 대화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 아니라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악수했고, 따뜻한 분위기였다"고 했다.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여전히 좋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북한이 큰 성장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는 점도 수차례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에선 언제나 물러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옳은 일을 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북한에 억류됐다가 석방 직후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건과 관련,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다만 "김 위원장이 (사망 사건이 일어난 이후) 나중에야 알게 됐고 그 문제에 대해 유감스러워했다"고 전했다. 한편 김정은은 이날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 취재진 질문에 이례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확대회담에서 '비핵화 준비가 됐느냐'는 백악관 출입기자의 물음에 "그런 의지가 없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28일 오후 12시 45분(현지 시각) 베트남 하노이의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 2차 미·북 정상회담장인 이 호텔 안팎이 크게 술렁였다. 50분 전에 시작해야 했을 두 정상의 업무 오찬이 아무런 통지 없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오후 4시 예정됐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오후 2시로 당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현장을 취재하던 각국 기자들 사이에서 "회담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말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원래 오후 2시는 업무 오찬을 마친 두 정상이 '하노이 합의문'(가칭) 서명식을 하기로 돼 있던 시간이다. 기자회견이 오후 2시로 당겨졌다는 것은 서명식 취소를 의미했다. 이미 1시간 가까이 지연된 업무 오찬도 취소됐을 가능성이 커졌다. 잠시 후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북한 대표단의 차량 행렬이 호텔을 떠난 데 이어, 트럼프 대통령 등 미국 대표단의 차들도 호텔을 출발했다. 오후 1시 30분 백악관은 "(미·북은) 어떠한 합의에도 이르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회담 결렬이었다.
◇"좋은 결과 생길 것"→"합의 못 이뤄"
전날 첫 만찬에 이어 이날 오전까지도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오전 9시 열린 단독 회담에서 두 정상은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김 위원장과 북한에 대해 커다란 존경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고, 김정은은 "우리가 훌륭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환상(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그는 "둘이 많이 노력했고, 이제 그것을 보여줄 때가 됐다" "나의 직감으로 보면 좋은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고도 했다.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을 '각하'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을 '훌륭한 지도자'라고 부르며 서로를 추켜올리던 전날의 분위기가 이어진 것이다.
두 정상은 35분 동안 단독 회담을 한 뒤 메트로폴 호텔 내부 정원을 함께 산책했다. 통역 없이 단둘이었다. 산책 중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만나 대화하며 웃는 모습도 카메라에 잡혔다. 뒤이어 열린 확대 회담 모두 발언 때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비핵화 준비가 됐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정은이 "그런 의지가 없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최고의 답"이라고 했다. 하노이 현지에선 "북한의 전면적 비핵화 조치와 미국의 과감한 제재 완화 조치를 교환하는 '빅딜'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확대 정상회담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오전 11시 55분까지로 예정된 회담이 1시간을 훨씬 넘겨가며 줄다리기가 계속됐지만 합의문 채택은 결국 실패했다. 비핵화와 상응 조치를 둘러싼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한 것이다. 두 정상은 오찬장에 나타나지 않고 각자 숙소로 떠났다.
◇트럼프·김정은, 회담 속도 놓고 신경전
외교 전문가들은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했던 오전 회담에서 실은 미묘한 신경전이 엿보였다"고 했다. 실제로 두 정상은 협상 '속도'에 상반된 반응을 여러 차례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단독 정상회담 모두 발언에서 "내게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서두르지 않겠다. 올바른 합의가 더 중요하다"고 하자 김정은은 "우리한테 시간이 제일 중요한데…"라고 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서두르지 않겠다"는 말을 2~3차례 반복했다.
이날 확대 정상회담에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참석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대북 강경파인 볼턴 보좌관은 트럼프 행정부 내 최고의 북핵 전문가로 꼽히지만 최근 대북 협상 과정에선 뒤로 물러나 있던 상황이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북한의 거부감을 의식해 전면에 나서지 않던 볼턴 보좌관이 회담장에서 북한의 다른 핵 시설 문제를 지적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 때문인지 북한은 배석자 수를 미국보다 1명 적게 해 볼턴 보좌관의 앞자리를 비웠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8일 2차 미·북 정상회담 결렬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서명할 합의서가 준비돼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미·북 협상 과정에 밝은 소식통들에 따르면 양측은 하노이에서 지난 21~25일 진행한 실무 협상을 통해 '하노이 합의'(가칭)의 윤곽을 잡은 상태였다. 핵심 의제인 비핵화와 상응 조치에 대해선 합의 문안을 도출하지 못했지만 나머지 사안들에 대해선 어느 정도 공감대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은 비교적 수월하게 합의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미국 조야 인사들을 만난 한 인사는 지난 26일 "북측이 두 차례 워싱턴에 와서 연락사무소 자리를 물색했고, 미국은 평양에 있는 독일 대사관 자리를 연락사무소로 쓰겠다고 제의해 놓고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 외교가에선 "(주한 미국 대사 대리를 지낸) 마크 내퍼 국무부 부차관보가 유력한 초대 소장 후보"란 말도 돌았다. 이날 확대 정상회담에서도 취재진이 김정은에게 '평양 연락사무소를 개설할 준비가 됐느냐'고 묻자 트럼프 대통령은 "나도 김 위원장의 대답을 듣고 싶다"고 했고, 김정은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했다. '오늘 발표하느냐'는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렇게 된다면 좋을 것"이라고도 했다.
양측은 종전(終戰) 선언 또는 이에 준하는 평화 선언(가칭) 추진에 대해서도 상당한 의견 접근을 본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대통령도 전날 김정은과의 만찬에서 '종전 선언을 할 것이냐'는 취재진 질문에 "지켜보자"며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양측은 6·25전쟁 중 북한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를 추가 송환하는 방안에도 잠정 합의한 상태였다. 외교 소식통은 "회담 결렬로 공감대를 이뤘던 사안도 모두 무산됐다"며 "비핵화와 상응 조치에 대한 이견을 좁히기 전에는 재추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2·28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북한 비핵화 협상이 상당 기간 표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회담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매우 생산적 시간을 보냈다"면서 "김정은과 계속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3차 미·북 정상회담 전망에 대해선 "빨리 열릴 수도 있고 오랫동안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가능성을 높게 보지는 않는 듯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이날 취재진과 만나 "우린 (북한과의 실무 협상) 날짜를 아직 잡지 않았지만 느낌상 (양측이) 조직을 재편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했다.
비핵화 협상의 진전을 낙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은 미·북이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지점을 확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영변 이외에 핵 시설 추가 폐기를 요구했으나 북한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전면적 제재 해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런 입장 차이는 한쪽이 전향적 양보를 하기 전엔 합의가 불가능한 것으로, 이를 조율하는 데는 상당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톱다운 협상 방식을 재가동하기 어려운 것도 북한 비핵화 협상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스티븐 비건 특별대표가 지난해 8월 북핵 협상을 전담한 후 북한 측의 무응대로 사실상 실무 협상 차원에서 진전이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급하게 2차 정상회담 날짜를 잡아 강행하면서 '결렬'이란 참사가 나온 후 같은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연말이면 차기 대선 준비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북핵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렬'이 충격 요법으로 작용해 미·북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정상회담과 달리 부담이 작은 실무 협상이나 정보기관 등을 통한 물밑 창구를 가동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백악관은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하노이 합의 결렬 직후 "두 정상은 비핵화와 경제 주도 개념(economic driven concept)에 대해 다양한 논의를 했다"고 했다. 이날 백악관이 사용한 '경제 주도 개념'이란 생소한 용어에 대해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소 안보통일센터장은 "협상 테이블에 가능한 한 모든 경제 관련 시나리오가 올라왔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재개를 넘어 북한에 대한 투자까지 미국이 유인책을 얘기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노이 2차 미·북 정상회담이 '정상 간 합의문' 없이 결렬된 것은 핵심 의제였던 북한 비핵화와 제재 완화를 놓고 양측의 간극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미국은 영변 핵시설 외 추가 발견한 대규모 우라늄 농축 핵시설 문제를 거론했다고 한다. 이에 북한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반대로 영변 핵시설 폐기 대가로 미측에 전면적인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영변 핵시설 폐기만으론 불충분하다며 거부한 것으로 전해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베트남을 떠나는 비행기에서 취재진에 "합의문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이었다"며 "미국은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에 핵능력 신고를 재차 요구했었다"고 했다. 미 정부 소식통은 이날 본지에 "협상팀이 어젯밤 트럼프 대통령에게 '영변 플러스 알파(α)'가 없을 경우, 다른 상응 조치 카드를 다 주더라도 제재 해제만큼은 절대 줘선 안 된다는 점을 주지시켰다"고 했다.
◇트럼프 "영변 외 시설 언급하자 北 놀라"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구체적으로 영변 핵시설 얘기를 나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영변 핵시설보다 플러스 알파를 원했다"고 했다. 이어 "(그간 협상 때) 나오지 않은 것 중에 우리가 발견한 것,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도 있었다"고 했다. '추가 발견한 시설이 우라늄 농축 시설 같은 것이냐'는 질문엔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북한이 놀랐던 것 같다"고 했다. 회견에 동석한 폼페이오 장관도 "영변 핵시설 외에 굉장히 규모가 큰 핵시설이 있다"며 "미사일, 핵탄두와 무기 체계가 빠져서 합의를 못 했다. (핵)목록 신고 작성 등에 합의를 못 했다"고 했다. 미측이 영변 핵시설 외 다른 핵·미사일 시설의 신고·폐기·검증까지 목표로 삼고 북한을 압박했다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른 우라늄 농축 시설'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간 미 조야(朝野)에선 영변 외 '제2, 제3 우라늄 농축 시설'의 존재를 확신해 왔다. 대표적인 곳이 평양 인근 남포시 천리마구역 동쪽 끝 '강선'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작년 6월 "미 정보 당국이 2010년 농축 규모가 영변의 2배인 강선의 비밀 우라늄 시설을 파악했다"고 보도했다. 우라늄 농축 시설은 대규모 재처리시설 등이 필요한 플루토늄 시설보다 은폐가 용이하다. 미국이 이날 협상에서 영변·강선 외 또 다른 시설을 지적했을 가능성이 크다. 작년 7월 미 외교 전문지 '더 디플로맷'은 "정보 당국이 영변, 강선 외에 세 번째 비밀 우라늄 농축 시설도 탐지해 냈다"고 전했다. 또 지난달 아사히(朝日)신문은 전직 청와대 관리를 인용해 "북한이 최대 10곳에 이르는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美 의지 오판한 北
김정은은 이날 회담에서 "모든 제재를 다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당초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재개, 또는 일부 제재 해제를 요구할 것이란 예상을 넘어선 것이다. 제재 해제가 절실한 김정은 입장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의 대가로 연락사무소 개설, 종전(終戰) 선언, 금강산 관광 재개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란 관측이다. 국내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전략적 베팅을 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의 반발을 부른 것으로 관측된다. 김정은의 공세에 넘어가지 않고 회담을 결렬시키는 선택을 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확대 정상회담 직전에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며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가 올바른 합의(right deal)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반드시 오늘 그렇다고 얘기할 순 없어도 좀 더 장기간엔 우리가 북한과 관련해 환상적인 성공을 거둘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이번에 반드시 타결을 짓지 않을 수 있다는 전략으로 나간 것이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은 "국내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한 트럼프가 '어설픈 딜(deal·거래)' 대신 '노 딜(No deal)을 택한 것"이라며 "북측이 영변만으로 전면적인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면 현재 협상 상황과 미국의 제재 의지를 오판한 것"이라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차 미·북 정상회담이 28일 결렬되면서, 정상 간 큰 틀의 합의를 하고 세부 사항을 채워 나가는 '톱다운(Top down)' 외교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지적이 크다. 결정권을 가진 양국 정상이 만나 '통 큰' 합의를 하는 톱다운 방식은 실무협상에서 구체적 합의를 해나간 19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6자 회담과는 다르다. 그런데 이번엔 재량권이 없는 실무진들이 핵심 의제에 대한 명확한 사전 합의를 못한 채 양 정상의 담판에서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려다 아무 성과 없이 끝나 버린 것이다.
청와대 등 일부에서는 톱다운 방식의 핵 협상을 '고르디우스 매듭 끊기'에 비유하면서 기대감을 높였다. 그러나 양 정상의 결단에 의존하다 보니 실무협상에서 세부 사항(detail)에 대한 사전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회담 날짜부터 잡고 미디어를 통한 흥행에만 신경을 썼다. 결국 1차, 2차 미·북 정상회담 모두 '부실 합의'와 '노딜(no deal)'이라는 빈손 회담으로 이어졌다. 이번 2차 미·북 정상회담은 1차 회담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북한 비핵화와 그 상응 조치에 대한 구체적 협의 없이 정상회담 날짜와 장소부터 먼저 발표됐다.
개문발차(開門發車) 형식의 회담에 대해 국내외에서 졸속 회담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2차 정상회담 일정을 발표했을 때 대북 협상 실무를 담당했던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평양에 도착할 즈음이었다. 미 전문가들은 "톱다운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실무진에 재량권이 거의 없고 역할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먼저 정해진 일정에 맞춰 협상하다 보니 시한에 쫓겨 제대로 된 합의를 이끌어 내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실무협상이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정상회담을 2월 28일로 밀어붙인 것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비건 대표와 북한의 김혁철 대미특별 대표는 최종 합의를 해야 할 하노이 회담 전날에는 만나지도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톱다운은 일반적으로 핵심 현안을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일괄 타결하는 방식으로 추진된다. 그러나 이번 협상은 북한의 주장에 따라 비핵화와 상응 조치의 수준을 단계별로 쪼개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형식은 톱다운 방식을 취하면서 실제는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을 놓고 지루한 기 싸움을 했던 과거 형태로 회귀한 것이다. 비핵화 개념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 조셉 윤 전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톱다운 접근이 최선의 방식은 아니다"라고 했었다.
톱다운 방식은 지도자의 역량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번 베트남 회담에서도 그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핵 문제 하나에만 집중해온 김정은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 모든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북한 핵 문제의 세부 사항까지 파악하기 힘들다. 28일 기자회견에선 비핵화의 세부적·기술적 문제까지 트럼프 대통령에게 질문이 쏟아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 과거 측근인 코언 변호사 청문회 때문에 회담 자체에만 집중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외교가에선 "김정은이 이런 트럼프의 약점을 파고들며 포괄적 제재 완화를 얻으려고 과도한 베팅을 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 스타일도 회담 전부터 우려스러운 점으로 지적됐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27~28일 열린 2차 미·북 정상회담이 결국 아무런 합의 없이 결렬되면서 베트남 현지는 허탈한 분위기였다. 하노이한인회는 이날 미·북 정상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는 간판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 이벤트를 진행하다가 협상 결렬 소식이 전해지면서 중단했다. 베트남인들 사이에선 "돈만 부담하고 협상이 깨져 얻은 게 없다"는 말도 나왔다. 일각에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베트남 공식 방문 일정(3월 1~2일)까지 취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는 긴급 대책 회의를 소집한 뒤 "김 위원장의 공식 친선 방문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상회담 취재를 나온 베트남 현지 매체 징(Zing)의 느엥 차웅 트웬 기자는 "종전선언과 평화 프로세스에 관심이 많았는데 협상이 결렬돼 너무 아쉽다"고 했다. 이날 베트남 증시도 전날 대비 2.5% 내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베트남 하노이 핵 담판 결렬에 대해 국내외 전문가와 외신들은 28일 "정상회담이 이렇게 끝난 전례가 없다"며 "실패한 회담"이라고 했다. 데니스 와일더 전 백악관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이날 "대통령급 정상회담이 이런 식으로 중단된 전례가 없다"며 "김정은을 '친구'라고 부르는 등 긍정적 분위기에서 갑자기 주요 일정이 취소돼 놀라웠다.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조셉 윤 전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도 "일반적으로 정상회담의 합의는 사전에 예정된 결론인데, 이번에 우리는 준비가 매우 덜된 것을 봤다"고 했다.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자신의 트위터에 '회담은 실패이지만 트럼프는 나쁜 거래보다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적었다.'실패하는 정상회담은 없다'는 외교가 속설이 이번에 뒤집혔다는 말도 있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날 "트럼프는 북한 비핵화 성과를 증명할 결과를 얻기 위한 희망으로 20시간 비행기를 타고 갔지만, 회담은 깜짝 놀랄 실패로 돌아갔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핵 군축이나 평화 선언, 대북 제재 축소에 대한 첫 단계 조치에도 합의하지 못하고 정상회담을 갑자기 마쳤다"고 했다. 국내 전문가들도 무리한 회담 추진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은 "국제사회에서 이번 정상회담처럼 어떤 결과물도 없이 끝나는 건 이례적"이라며 "조금의 합의점만 맞아떨어졌어도 '스몰 딜'이 나왔을 텐데 양측이 자신의 요구 사항만 준비해 온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이번 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의 내부 정치 국면 전환용 성격이 강했다"며 "실무 협상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회담을 밀어붙인 것이 문제였다"고 했다. 남성욱 고려대 행정대학원장은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을 어르고 달래면 제재 완화가 가능하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실무 합의도 없이 회담 날짜를 잡은 건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했다. 신각수 전 외교부 2차관은 "빅 딜이 됐으면 좋았는데, 우려했던 '배드 딜'이 아니라 차라리 '노 딜'이 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하노이 합의 결렬' 후폭풍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향하고 있다. 60여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베트남 하노이에 왔지만 정작 귀국할 때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회담 과정에서 북한 당국은 이례적으로 주민들에게까지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렸다. 우리 정부 안팎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귀국한 뒤 마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민심을 수습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말도 나온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작년 4월 전 세계가 주목한 가운데 열린 판문점 1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국제무대에 데뷔한 이후 사실상 첫 '외교적 실패'를 경험한 셈이기도 하다.
정부 관계자는 28일 "기차를 통해 베트남에 입성한 김정은은 총 열흘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됐다"며 "'자신감'을 표출한 것이었지만, 결론적으로 성과가 전무하게 돼 그만큼 위험 부담도 커졌다"고 했다. 김인태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김정은이 기차를 타고 실시간으로 내부에 동향을 전한 것은 회담 성사 가능성을 확신했기 때문"이라며 "대북 제재 완화를 기대했던 북한 특권층이 회담 결렬에 실망이 클 것"이라고 했다. 국제 사회의 제재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 이번 회담을 통해 숨통이 트이길 기대했는데 회담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김정은의 내부 장악력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과거와 달리 이번 회담에서 '시간'을 유독 강조한 것도 최근 급격히 나빠진 북한 경제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김정은은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단독 회담을 앞두고 "우리에게는 시간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고, 이어진 확대회담에서도 "우리는 1분이라도 귀중하다"고 했다.
김정은 입장에선 기존 대미 협상 전략을 재점검할 필요성도 생겼다. 그동안은 '핵'을 무기로 외교 무대에 나서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 등 '빅샷'과 어울리며 곳곳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책임을 따져야 할 상황이 됐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은 "수령이 체면을 심하게 구겼으니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김정은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떠난 베트남에 홀로 남았다. 회담 결렬 후 곧바로 숙소인 멜리아 호텔로 돌아왔지만 저녁 늦게까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북 회담이 결렬된 상황에서 애초 예정됐던 나머지 베트남 일정을 모두 소화할 것인지 주목된다. 예정대로라면 1일 오전 하노이 주석궁에서 응우옌 푸쫑 국가주석을 만나고 호찌민 전 베트남 주석 묘소 참배도 계획돼 있다. 1일 오후 또는 2일 오전에는 베트남 경제 시찰 일정도 있다. 베트남의 대표적 산업단지인 하이퐁이 후보지다. 하지만 미국에서 '제재 완화 또는 해제'를 얻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산업단지 시찰 등 '개방'을 전제로 한 일정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때문에 현지에선 김정은이 귀국을 앞당길 가능성도 거론되지만 현재로선 예정된 일정을 소화할 가능성이 크다.
김인태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북한 당국은 이미 김여정을 통해 선전선동부에 지침을 하달했을 것"이라며 "1일부터 북한 매체들은 미국과의 회담 결과보다 김정은의 하노이 일정을 크게 부각할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은 2일 오후 하노이에서 전용 열차를 타고 귀국하는 것으로 돼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김정은이 60여 시간 동안 힘들게 열차를 타고 하노이에 왔는데, 빈손으로 또 장거리 열차를 타게 됐다"며 "돌아가는 60시간은 정말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했다. 귀국길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이번 회담 결과를 공유하거나 우리 정부에 구원의 손길을 요구할 수도 있다. 열차가 아니라 비행기를 이용해 최대한 귀국 시기를 단축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회담 결렬로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안보 정책도 적잖은 난관에 부딪히게 됐다. 당장 북한의 비핵화와 제재 완화를 전제로 추진하려 했던 남북 철도 및 도로 연결, '신(新)한반도 체제' 구상, 김정은의 서울 답방 등 각종 정치·외교 이벤트들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북한 비핵화 성과를 전제로 남북 관계를 급속 진전시키려 했던 것도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회담 결렬을 예상하지 못한 청와대의 정보력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런 때일수록 중재 역할이 더 커졌다"며 위축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청와대는 이날 오후까지 회담 결렬을 예상하지 못했다. 김의겸 대변인은 이날 오후 정례 브리핑 때 "오늘 회담 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잠시 휴지기에 있었던 남북 대화가 다시 본격화할 것"이라고 했다. 회담 결렬은 청와대의 시나리오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브리핑 후 30여분 만에 미·북 정상의 오찬과 합의문 서명식이 취소될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아직 상황을 지켜보자"며 반전을 기대했지만, 회담 결렬은 결국 현실화됐다. 문 대통령은 노영민 비서실장 등 핵심 참모들과 TV로 미·북 정상의 서명식을 지켜볼 예정이었다가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북 정상회담과 3·1절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추진됐던 평화 이벤트들도 차질을 빚게 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 25일 "식민과 전쟁, 분단과 냉전의 시간에서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며 '신한반도 체제'를 예고했었다. 남북 경협을 언급할 예정이던 '3·1절 기념사'도 일부 수정했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의 주인은 우리"이며 남북 관계가 더욱 강화돼야 한다는 기념사의 핵심 내용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상황이 어렵더라도 위축될 필요는 없다"며 "남북 관계를 더욱 강화해야 할 이유가 명확해졌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여권 관계자는 "청와대와 여당의 지지율 버팀목이었던 남북문제가 악화된다면 내년 총선 및 국정 운영에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북 정세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이 부른 외교 참사라는 비판도 나온다. 외교가에선 2차 미·북 정상회담 전에 한·미 정상회담 등을 통해 의제 조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지난 19일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전화 통화를 하는 데 그쳤다. '한·미, 미·북, 남북 관계가 모두 좋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문 대통령은 구체적 합의 없이 추진된 미·북 정상회담에 대한 우려에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개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발목을 잡으려는 사람들"이라며 정치 공세로 규정했다. 판단 오류를 가져온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물론 외교부·통일부 등 핵심 담당자들에 대한 문책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밤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를 통해 향후 미·북 간 중재 역할에 다시 나설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내용을 가장 먼저 공유하고 싶었다.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대화해서 그 결과를 나에게 알려주는 등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해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역사적 과업 달성을 위해 트럼프 대통령의 지속적 의지와 결단을 기대한다"고 했다. 양국 정상은 이른 시일 내에 정상회담을 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정부는 미국과 북한이 긴밀한 소통과 협력을 지속해 나가면서 대화의 모멘텀을 유지해나가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문 대통령의 역할과 책임감이 더 커졌다. 더 적극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차 미·북 정상회담 당일인 28일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하는 청와대 국가안보실 1·2 차장을 동시에 교체했다. 특히 김현종(60)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남관표 국가안보실 2차장 후임으로 임명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신임 2차장은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등을 주로 다뤄온 통상 전문가다. 청와대가 이 같은 '파격 인사'를 한 것은 대북(對北) 제재 완화 이후 본격적인 남북 경협을 추진하기 위한 목적 아니었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미·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합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고 김 2차장에게 문 대통령의 남북 및 동북아 경제 협력 구상을 지휘토록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날 미·북 정상회담에서 양 정상(頂上) 간 어떤 합의도 도출하지 못하면서 이 같은 계획이 상당 부분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너무 앞서나간 인사였다는 얘기다.
김 차장은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4년 민간인으론 처음으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에 발탁돼 한·미 FTA 협상을 지휘했다. 한·미 FTA 타결 이후 유엔 대사, 삼성전자 해외법무 담당 사장 등을 지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7월 다시 통상교섭본부장에 발탁돼 한·미 FTA 개정 협상을 이끌었다. 그는 삼성전자에서 퇴임한 이후 중국 단둥에서 개인 병원을 약 1년간 운영했다. 서울 출신으로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학·석사, 통상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차장은 이번 정부 들어 남북 경협 및 중·러 등 북방 국가와의 경제 협력 사업 검토 업무도 함께 해왔다. 그는 2010년 낸 책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에서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남북 간 경협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다며 '남북 FTA' 추진을 건의했다고 밝혔다. 충북 청주 출신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은 육사 36기로 육군본부 참모차장, 합참 합동참모차장 등을 지냈다. 유명희 산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행시 35회로 박근혜 정부 청와대 외신비서관, 산자부 자유무역협정교섭관 등을 지냈다. 현 정부에서 사의를 표명했던 것으로 알려진 유 본부장은 남편이 자유한국당 정태옥 의원이다. 그는 작년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살고, 망하면 인천 산다)'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남편이 야당 의원이라는 이유로) 유 본부장이 그만두려 했다고 한다"며 "그러나 문 대통령이 '남편과 부인은 별도 독립된 인격체인 만큼 (인사는) 중립적으로 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