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북한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하노이 노딜' 이후 정한 '연말 시한'을 앞에 두고 9일 설전을 재개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적대적 방식으로 행동하면 (김정은은) 사실상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자, 북한은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명의 담화를 통해 “우리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맞받아쳤다. 4시간 30분 후 리수용 노동당 국제담당 부위원장도 담화를 통해 “트럼프는 더 큰 재앙적 후과를 보기 싫거든 숙고하는 것이 좋다”고 압박했다. 미·북이 연일 상호 비판 수위를 높이며 대치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 자신을 여전히 “특별한 관계”로 규정했고, 김영철은 “우리 국무위원장은 미국 대통령을 향해 아직까지 그 어떤 자극적 표현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기 싸움은 하면서도 협상 여지는 남겨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8일(현지 시각·한국 시각으로는 9일 새벽) 트위터에 글을 올려 “(북한) 김정은은 너무 영리하고, 적대적 방식으로 행동하면 잃을 것이 너무 많다”며 “(잃는 것은) 사실상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전날 북한이 평북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에서 ‘중대 시험’을 했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로 ‘레드라인(금지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가 김정은에게 직접 비판적 발언을 한 것은 싱가포르 회담 직전인 작년 5월 이후 처음이다. 그는 “(김정은은) 약속대로 비핵화를 해야 한다”고도 했다.
북한은 바로 당일인 9일 오후 김영철의 담화를 통해 정면 반박했다. 김영철은 트럼프 대통령을 “참을성을 잃은 늙은이” “경솔하고 잘망스러운 늙은이”라고 부르며 “(협상 시한인)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망령 든 늙다리’라고 부르는 날이 다시 올 수 있다”고도 했다. 그는 이어 “(적대적 행동은) 놀라라고 하는 일인데 놀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우 안타까울 것”이라며 “시간 끌기는 명처방이 아니다”라고 했다. 리수용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은 5시간 뒤 추가 담화를 통해 “트럼프가 겁을 먹었다”면서 “트럼프의 막말이 중단돼야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어 “연말에 내리게 될 최종 판단과 결심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하게 되며 국무위원장은 아직까지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미국의 태도에 따라 전략 도발 재개 여부를 결정할 것이란 얘기다.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발표한 담화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적대적으로 행동하면 사실상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경고에 대해 "우리는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김영철 위원장은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은근히 누구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듯한 발언과 표현"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나는 트럼프에 대한 우리 국무위원장의 인식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북미 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7년 때처럼 담화에서 '대통령' 직함을 생략한 채 '트럼프'를 이름으로만 지칭하며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인' 발언이 계속될 경우 트럼프를 다시 '망령든 늙다리'로 부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 담화가 나오고 약 4시간 30분 뒤에는 리수용 노동당 국제담당 부위원장도 담화를 내고 "국무위원장의 심기를 점점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트럼프의 막말이 중단되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을 "경솔하고 잘망스러운 늙은이"라고 비난한 김영철 담화와 비교하면 비난 수위를 한층 낮춘 것으로 읽힌다. 리 부위원장은 "얼마 안 있어 연말에 내리게 될 우리의 최종판단과 결심은 국무위원장이 하게 되며 국무위원장은 아직까지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은 상태에 있다"며 "또한 누구처럼 상대방을 향해 야유적이며 자극적인 표현도 쓰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직 김 위원장이 '강경 노선'을 천명하거나 북미 관계가 되돌릴 수 없는 파국 상태로까지 악화한 것은 아니니 발언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당부처럼 들린다. 미국과 대화의 끈을 먼저 놓고 싶지는 않지만, 최고존엄에 대한 모욕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북한 당국의 복잡한 속내가 읽힌다. 앞서 김영철 위원장도 "우리 국무위원장은 미국 대통령을 향해 아직까지 그 어떤 자극적 표현도 하지 않았다"며 "물론 자제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북한에서 가장 강한 비난은 최고영도자인 김정은 위원장 입에서 나오는 데 아직은 직접 트럼프 대통령을 비난하지 않은 만큼 미국이 관계 회복에 나설 기회가 있다는 메시지로 추정된다. 특히 다음 주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특별대표의 방한이 예상되는 가운데 만약 깜짝 북미 회동이 성사될 경우 최근 말폭탄으로 고조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다시 대화를 시도할 수도 있다.
김영철 위원장은 이어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며 "격돌의 초침을 멈춰 세울 의지와 지혜가 있다면 그를 위한 진지한 고민과 계산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지금처럼 웃기는 위세성, 협박성 표현들을 골라보는 것보다는 더 현명한 처사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시간 끌기는 명처방이 아니다"라며 "미국이 용기가 없고 지혜가 없다면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미국의 안전위협이 계속해 커가는 현실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언급은 그동안 북한이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등을 내세워 여러 차례 미국에 요구한 대북 적대정책 철회를 재차 압박한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이날 담화에서 미국의 '현명한 처사'를 촉구하면서도 연말 시한이 그대로 지나가면 그동안 경고해온 '새로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김영철 위원장은 "트럼프의 이상한 목소리를 듣고 우리가 앞으로 할 일에 대해 고려할 의사가 전혀 없으며 걱정 또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하면 자기는 놀랄 것이라고 했는데 물론 놀랄 것"이라며 "놀라라고 하는 일인데 놀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우 안타까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이 적대적으로 행동한다면 나는 놀랄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난 7일 발언대로 조만간 놀랄만한 적대적 행동에 나설 수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북한은 지난 7일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중대한 시험'을 했다고 전날 발표했는데 전문가들은 북한이 인공위성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준비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