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서독에서의 일정들을 마치고 (구) 동독으로 향하는 노정의 중간지점이기도 한 국경박물관에 들렸을 때 나는 한 장의 사진 앞에서 오래도록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살아있다면 지금 65세의 평범한 할아버지가 되었을 한 사람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35세로 역사 속에 길이 남아있다.
바로 지금의 내 나이에 그는 자유를 찾아 기꺼이 한 몸을 내던졌었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구) 동독정권의 무자비한 보복의 총탄에 맞아 동서독 분단의 비극의 현장=국경선에서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것이다.
사진속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82년 3월 29일, 당시 동독쪽에 설치되어있는 전기철조망을 수리 작업하던 인부였던 하인츠는 지금도 현장에 보존되어 있는 작업차량의 바가지를 이용해 고압철망을 넘었고 서독쪽을 향해 경사진 언덕을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다가 그만 총에 맞고 쓰러져 영영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청년의 이름은 하인츠 요셉 그로쎄,
금발의 곱슬곱슬한 머릿결과 굵직한 눈썹이며 또렷한 눈망울로 지그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마치 살아 있는듯 생동한 그의 사진 앞에서 나는 왜 이렇게 쉽사리 발길을 옮기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그것은 이름 석 자,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북한의 “하인츠 요셉 그로쎄”들의 일그러진 형상들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속속 떠올라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한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두만강에서, 압록강에서, 동해에서, 서해에서, 심지어 DMZ의 고압선 철조망을 넘어서도 지옥의 땅= 북한땅 으로부터의 탈출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구 서독 헤센주와 튀링엔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Schifflersgrund" 국경박물관에서 우리 일행을 맞아준 마리야 플룬트케 해설사선생님은 독일의 곳곳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의 인상 좋은 할머니셨다.
우리가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한국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이라서 그런지 유달리 반기셨고 보다 상세한 설명들을 해주려 노력하시는 모습이 안겨와 가슴이 뭉클해졌다.
희끗희끗한 백발을 짧게 자른 경쾌한 모습으로 일행들을 맞아주신 마리야 해설강사님은 유럽사람들 특유의 활달한 제스츄어를 섞어가면서 때론 유쾌한 웃음으로, 때론 심각하고 의미심장한 어조로 열심히 국경박물관의 존재에 대해, 당시 동서독국경의 모습에 대해, 그리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픈 동서독 분단시절의 흔적들에 대해 토로하셨다.
국경박물관의 이곳 저곳을 열심히 둘러보면서 설명을 듣던 중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크레모아”라고 불리는 자동발사장치이다.
동서독국경에 설치되었던 철조망 곳곳에 설치되었던 자동발사장치 “크레모아”
철조망에 고정된 “크레모아”의 방아쇠에 가는 철사가 연결되어 있었고 누군가 서독쪽으로 넘어가려고 철조망근처에 다가가 철사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사정없이 총탄이 쏟아진다고 했다. 이러한 “크레모아”가 무려 삼단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1983년도까지 독일전역의 국경선 철조망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라보기만 해도 섬찍한 “크레모아”를 바라보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기억속으로 중국과 마주한 북한접경지대 곳곳에 삼엄하게 설치되어있는 철조망들과 탈출하는 주민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북한국경경비대들의 냉혹한 모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입만 열며는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 필승불패”이니, “주체조선의 위력을 만방에 자랑하라”고 웨치는 북한이지만 갈수록 악화되는 경제난으로 인한 탈출의 대오를 막아보려고 행하는 것이 바로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지 하는 것을 다시금 느껴보았다.
동서독 분단시기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국경선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에게 마리야 해설강사님은 손짓으로 하얀 십자가를 가리키셨다.
저 곳이 바로 사진속의 “하인츠 요셉 그로쎄”가 총탄을 맞고 쓰러진 자리라고 한다.
1982년 총격사건이 있은 후엔 서독쪽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십자가가 만들어져 세워졌었고, 통일이후에야 지금 보이는 것처럼 정확한 희생지점에 하얀 나무십자가를 만들어서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마리야강사님의 목소리는 안타까운 희생자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다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우연하게도 요셉은 마리야 해설강사님의 1년 후배라고 하셨다.
“하인츠 요셉 그로쎄”의 탈출사건이 있었지만 북한처럼 삼대까지 끌어가는 가혹한 정치범관리와는 정 반대로 동독에서는 일체의 가족들을 향한 불이익은 없었을 뿐더러 조촐하게 장례까지 치르도록 허락해주었다고 한다. 북한 같으면 정말 꿈도 못 꿀 일이다.
식량난 이전에는 간헐적으로 북한의 외교관이나 유학생, 휴전선 인근의 인민군 등 소수의 사람이 남한에 귀순을 해왔지만 식량난 이후 러시아와 중국을 통해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남한으로 들어왔으며 2011년 12월 현재 통일부통계자료에 의하면 23,100명에 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불가피한 경우나 가족들이 이미 사망한 경우, 혹은 북한 민주화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곤 대다수의 남한 입국 탈북자들이 자신의 귀순사실을 숨긴다. 자신이 남한으로 온 것이 알려지면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인츠 요셉 그로쎄”의 장례식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정치사상범에 대해 더없이 잔혹한 악행을 일삼는 북한과는 극명하게 대비가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음을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해본다.
국경박물관에서 머무르는 세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나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통해 몇 번이나 북한을 오고 갔는지 모른다. 아마 이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함께 동행했던 탈북 일행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마리야 강사님의 열정적인 해설은 나의 이러한 생각에는 아랑곳없이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987년 당시 근무하던 식료품회사에서 동독국경수비대에게 식품수송을 위해 특별허가증을 발급받아 들어오면서야 처음으로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철조망의 존재를 보게 되었다고 했다.
회사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철조망너머로 구경하고 있는 서독사람들을 먼발치로나마 보게 되었을 때 감정은 미처 표현할 수 없이 복합적이었다고 한다.
문득 진한 흥미를 느낀 내가 다시 반복적인 질문을 드렸다.
더 정확한 느낌에 대해서 말씀해달라고 하자 마리야강사님은 흔쾌히 응하셨다. 정확히 말하여 분노와 슬픔 두 가지 느낌이었다고 하셨다. 분노는 제한되고 구속된 현재의 삶에 대한 부분이었고, 슬픔은 지금의 동서독으로 분단된 현실의 괴로움과 이것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부분에서라고 하셨다.
다시 나는 마리야 강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묘한 공감대까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동서독접경지대 국경박물관을 돌아보는 시간을 통하여 눈만 감으면 삼삼히 떠오르는 고향과 눈물의 강 두만강, 그리고 나의 정착시절 소중한 땀과 눈물과 고뇌로 얼룩진 제2의 고향 안동까지 추억의 파도를 타고 떠다녀야 했었다.
어느새 나만의 생각에서 깨어났고 마리야 강사님은 가을하늘의 태양만큼이나 밝은 미소를 활짝 지어 보이신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아쉬운 표정을 지으신 채 개인적인 의견을 거침없이 우리들에게 말씀해주셨다.
통일로 가는 길에 사람들끼리의 만남은 더없이 중요하며 만남이 이루어져야 의견이 교환되고 오해와 갈등이 풀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거듭 강조하셨다.
그리고 끝으로 통일독일처럼 남북한도 힘을 모아 반드시 통일되기를 바란다고 어조에 힘을 실어주셨다. 마리야 강사님의 친절한 배웅을 받으며 국경박물관을 나서는 나의 머릿속에는 벌써 오늘 받은 느낌을 정리하여 달아줄 제법 근사한 제목이 떠올랐다.
“그 곳은 평화로웠다.”
불과 이십년 전까지만 하여도 불안과 공포, 분노와 슬픔 등 분단의 비극이 고스란히 녹아내려있던 절망의 이 곳이 통일을 이루어낸 오늘날에는 생명이 살아있는 더없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발성과 비폭력이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가지고 독재에 맞서 과감히 떨쳐 일어났던 동독주민들이 단결하여 탄생시킨 소중한 평화는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을 값진 선물이었다.
통일비전연구회 소속 동명숙 (동국대 북한학과)